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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원활한 소통" - 2008.7.2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7-03 조회수391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7.2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아모5,14-15.21-24 마태8,28-34

                                                            
 
 
"원활한 소통"
 

아침 성무일도 시 다음 시편 구절이 좋았습니다.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 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

생명과 빛의 주님과의 원활한 소통이
우리의 모든 소통의 바탕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시중에서 단연 회자되고 있는 단어는 ‘소통’입니다.
정부와의 소통이 안 되어 끊어지지 않는 촛불 시위입니다.
 
소통을 통해 저절로 해소될 문제를
힘으로 억누르려하니 폭력의 악순환입니다.

자주 인용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수도원의 앞문은 세상에 열려있고,
 뒷문은 사막에 열려있어야 한다.'
 
소통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말입니다.
어찌 수도원뿐이겠습니까?
방도 앞문 뒷문 활짝 열어 신선한 공기로 환기해야 하듯,
공동체나 개인도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뒷문은 사막의 하느님께 활짝 열려 있어야 건강한 영성입니다.

방안이나 성당에 들어오면
본능적으로 창문 향해 눈길 향하듯
소통의 욕구는 우리 모두의 근원적 욕구임을 깨닫게 됩니다.
 
앞문 뒷문 없는 집이라면 그대로 고립단절의 밀폐된 무덤입니다.
대부분의 심신의 병들은 폐쇄된 무덤 같은 생활에서 기인합니다.
 
과연 나는, 공동체는, 우리나라는
앞문 뒷문 활짝 열려있는 자유의 상태인지요,
혹은 앞문 뒷문 닫힌 무덤 같은 상태인지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길로 다닐 수 없었다.’

마귀 들린 두 사람,
고립단절 되어 무덤 속 같은 삶일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누구나의 보편적 욕구가 소통의 욕구요 표현의 욕구입니다.
이게 막힐 때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잃은 수인이요 노예의 삶입니다.
저절로 미치게 되어있습니다.
 
외향적인 이들은 거칠고 사납게 되고
내향적인 사람들은 깊은 우울증이나 자폐증에 빠집니다.
 
바로 이를 일컬어 마귀에 들렸다는 상징적 표현을 쓰는 겁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소통이 되지 않아
무덤 속 같은 삶으로 심신의 질병을 앓고 있는지요.

소통을 가로 막는 게 바로 마귀요 악입니다.
진정 주님과 함께 할 때 소통의 삶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매일미사와 성무일도의 기도로
앞문 뒷문 활짝 여는 우리들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듯
빛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어둠의 세력은 저절로 노출되어 발붙일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빛 앞에 악의 정체는 환히 들어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마침내 ‘가라.’ 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혼비백산 달아나는 마귀들입니다.

우선적인 게 하느님과의 소통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이 원활할 때 저절로 이웃과의 소통도 원활해집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앞문 뒷문 활짝 열려 원활한 소통입니다.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마음 갈려 분열될 때 그 사이로 악의 세력이 침투합니다.
갈림 없는 마음으로 선을 찾고 사랑하며 실천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이 없는 온갖 화려한 전례들
전혀 하느님과의 소통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제물을 바친다 해도 받지 않고,
  너희의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 치워라.”

삶이 받쳐주지 않는 온갖 전례 시끄러운 소음으로
공허만 가득 안겨줄 뿐
하느님과의 소통에 전혀 효과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정의를 물처럼 흐르게 하고, 선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이래야 주님과는 물론 이웃과의 원활한 소통입니다.
이런 삶이 받쳐줄 때 진선미(眞善美)로 빛나는 전례요
하느님께서도 즐겨 받아주실 것입니다.
 
삶과 전례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삶이 좋아야 전례도 좋고 전례가 좋아야 삶도 좋습니다.
 
더불어 활짝 열리는 우리의 앞문 뒷문에 원활한 소통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주님과는 물론 이웃과의 소통도 원활해지는 우리들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 주리라.”
(시편50,23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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