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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6.0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6-03 조회수9,132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7년 6월 3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사도 28,16-20.30-31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

바오로는 자기를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20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30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복음 요한 21,20-25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전에는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밑이나 골목

모퉁이 마루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골목이나 동네 넓은

공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도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의 인구가

줄은 일까요?
그보다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하나같이

다 바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그 누구도 바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놀 틈이 없고,

 어른들은 돈 벌이 때문에

여유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지금 훨씬 더 잘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전과 비교했을 때

여유는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습니다.
과거보다 잘 살아도

여유가 없는 지금의

모습을 생각해보지요.

열심히 노력해서 승진을 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여유 없이 살아갑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부유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보다

더 많은 부를 원하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1등을 할 수

 없을 텐데, 1등이 아니면 실패한

인생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에 신경을 쓰고

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과연 어느 정도까지 되어야

만족하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하게 될까요?

그러나 세상 것에 대한

만족도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으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지금보다 더 높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과연

어떻게 될 지에 대해 묻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을 정도로 사랑을

많이 받는 제자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의 미래가 더욱 더 궁금했나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주님을 따르는

 길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주님을 따르는 일뿐인데,

이는 소홀히 하면서

다른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로 내가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남과 비교하면서

나의 부족함에 대해

불평불만의 모습으로

나아갔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계속해서

 부, 명예, 지위, 권력

등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눔은 우리를

'진정한 부자'로 만들며,

나누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또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마더 테레사)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원리"

저는 지금 현재 17년째

매일 새벽 묵상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8권의 책을

출판했고 이곳저곳에서

원고 청탁을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많은 글을

써서 그럴까요?

 사람들은 제가 학창시절에

국어를 무척이나

잘 했을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학창시절에 제가 제일

재미있어하고 또한 잘 했던

과목은 ‘수학’이었습니다.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때에 만났던 수학

선생님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께서는

수학 문제를 푸는 방법만을

가르쳐줬는데,

이 선생님께서는

수학의 원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원리를 조금씩 깨우치게

되면서 문제 푸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좋은 성적을 얻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공부 자체가

재미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원리를 통해

논리를 갖게 되었고,

이 논리가 글 쓰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지혜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런데 결과만을 생각하다보니

 그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기술만을 얻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 나아가는 것 역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원리만을

알게 된다면, 이 세상을

분명히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기준으로

잘 사는 것, 즉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만족이라는

 결과만을 추구하다보니

주님께 나아가는 원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서로 사랑하라.”

어렵다는 수학도

원리만 알면 간단해집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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