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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근원을 흔드는 영적인 힘 / 이인주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25 조회수1,012 추천수15 반대(0) 신고
 
 
근원을 흔드는 영적인 힘
 

인류를 지탱하는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을 철학자들은 4원소로 구분했다. 물과 불과 공기 그리고 흙이었다. 4원소 중의 으뜸이라고 하는 물이 오늘 성경말씀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큰 철학자 탈레스는 물을 일컬어 만물의 근원이라고 했다. 또한 하느님의 창조의 시작은 말씀이긴 하지만, 그 형체로서 생명체를 탄생시킨 것은 바로 물이 근원이었음을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만큼 물은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깊게 봐야하는 것 중의 하나는 물을 단지 생활에서의 목욕하고 마시는 그런 정도에서 바라보는 그런 물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며 인류의 근원으로서의 물과 그리고 인류의 시작으로서의 물로 봐 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탄생과 죽음의 예절 안에서 물 그것도 거룩한 성수를 사용해 온 것이다.


모세가 광야를 통과해 나오면서 물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음을 우리는 잘 안다. 현대과학의 세상에서도 바다 위나 사막을 체험한 사람들은 여행이나 통과 제의 중의 하나인 미션을 수행함에 있어 물이 얼마나 소중한 가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본다.


베트남 출신의 보트피플이었던 카오 신부님은 월남 전쟁이 끝나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조국을 떠나라는 명을 받고 형제 몇몇이 쪽배를 타고 조국을 탈출한다. 부모님 보시기에 베트남 안에서 당분간 희망이 없기에 자신들은 살만큼 살았지만 자식들의 삶이야 구만리 같기에 급히 쫒아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급하게 탈출했던 것처럼, 그들의 일행도 긴박한 탈출의 길이라 철저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예상과는 너무 빗나가는 쪽배위의 여행이라, 머지않아 식량과 물이 떨어져 감을 느낀다.
 
망망대해에 낮은 태양이 너무 강하고, 밤은 바다 바람에 너무 추워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점차 자신감을 잃어가는 그들이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먼저 식량이 떨어지고 곧이어 물까지 고갈이 되고 만다.
 
비라도 오면 좋으련만 비는 오지 않는다. 결국 이슬을 받아야 하고 그것으로 식수가 모자라니 소변을 받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이러길 몇 칠 기도와 서로의 위로와 격려도 한계에 다다라 오로지 물물 하는 순간과 의식의 오락가락 함 안에서 멀리 육지가 보인 것이 일본이었단다.
 
그때 그 희망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저를 살려주신다면 모든 것을 다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했던 그 약속을 지켜 지금은 일본 예수회 사제로 잘 살아가고 있다.
 

이만큼 물은 소중하다. 이 외에도 타클라칸 사막을 빠져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물과 낙타의 소중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산다. 원인은 물이 없어서 이다. 호렙산은 바위산이라 사방을 둘러봐도 물이 나올만한 구석이 없다. 하느님의 사람 모세도 이 절박한 상황에서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어쩔 수 없이 하느님께 울부짖는다.
 
“이 백성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실 자신의 한계 안에서 답을 구할 길이 없는 모세는 하느님께 울부짖으며 호소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 몽땅 맡긴다.
 
이 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해결의 답을 내려주심을 우리는 보고 있다.
 

우리는 많은 상황에서 한계를 맞이한다. 이 한계를 맞이할 때 아 끝이야 하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내 것이었고, 이제부터는 그분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야 하면 그때부터 새로운 영적인 장이 열림을 우리는 깨달음과 동시에 굳게 신뢰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모세와 같은 굳은 신뢰 말이다. 그 하느님과의 굳은 신뢰 안에서 육적인 갈증과 영적인 갈증까지도 다 해결됨을 본 것이 바로, 무리바 바위에서 물이 터짐을 본 것이 아닌가?


육신생활에서도 물이 없으면 불편을 넘어 고통이 따르고 그 뒤엔 생명까지 위협받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 영신생활에서도 영적인 물이 없으면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는 보지 않아도 훤하다.
 
육적인 갈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갈증이 펼쳐진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정오 사마리아 여인과의 우물가에서의 만남에서 너무 정확하게 묘사해 주고 계신다. 이건 뭘 의미하는 것인가를 관상 안에서 살펴보자.


참으로 묘한 장면이 이방인의 동네 사마리아에서 펼쳐진다. 예수님과 그의 일행은 아직 이방인의 동네를 여행하고 있었다. 정황상으로 봐서는 여행이라기보다는 쫓기는 모습이 더 정확한 표현으로 보인다.
 
대개 정오엔 아랍사람들이라면 쉬는 시간인데 예수님의 일행도 사마리아의 여인도 우물가에 나와 있었다는 점이 신비이다. 아마도 예수님을 도우려는 그런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럼 뭐란 말인가?
 
예수님은 급히 그 마을을 빠져 나가고 싶었고, 여인은 자신의 물적 갈증 너머의 영적 갈증으로 인해 그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깃거리라도 사 오라고 보내신 것 같고, 예수님 혼자 물가에 좀 쉬면서 목을 축여가며 기도 가운데 앞으로의 일을 구상하려고 우물가를 찾았는데, 그 시간에 물을 기는 웬 여인이 오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어떻게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옥신각신 하는 대목을 보며 사람들의 삶 속에 형식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느낄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 순간을 안 놓치시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 그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물을 주시지 않는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그 말은 맞다.” “그러나 다섯 명의 남자가 있었고, 지금의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들으며 느끼는 것은 예수님은 족집게 점쟁이 같기도 하고, 간담을 서늘케 하는 예언자 같으시며, 모든 것을 다 해결하시는 해결사로 보이신다.
 
그건 그렇고, 그 여인이 왜 그 시간에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지를 나름대로 알 수가 있다. 어떻든 이 여인을 통해 죄 중에 회심이 이뤄지면 그보다 더 큰 은총이 따로 없음을 그대로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참으로 축복의 장면이다.


더 큰 축복은 그 여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함으로 해서 그냥 지나칠 마을이 온통 회심과 축제와 축복의 마을로 바뀌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마을 사람들에게 큰 영성강연을 하셨고, 아픈 이들을 다 치유해 주셨으며, 하늘나라가 열리도록 그 마을을 축복해 주셨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극진히 모셨다.
 
그로 인해 육적영적 갈증이 다 해소되는 축복의 시간이 그 마을을 온통 감쌌다. 사순의 축복의 진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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