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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84) 나의 과거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24 조회수417 추천수3 반대(0) 신고
 

작성일    2004-03-13 오전 8:46:29     조회수     618

 

 

(84) 나의 과거

              이순의

 

 

80년5월19일 

아버지께서 대학병원에서 강제퇴원을 당했다. 나는 차도 없이 조용한 소름의 거리를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걸어가고 있었다. 가족들은 전화가 끊어져 아버님께서 강제퇴원을 당한 상황을 짐작하지도 못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군인들의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은 딸의 목숨이 걱정되셔서 거리에 놓여 진 황갈색 고무 통으로 된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들어가라고 하셨다. 당시에는 연탄을 쓰던 시절이었으므로 거리의 쓰레기통들이 하루나 이틀분의 연탄재를 담을 수 있는 큰 통이었다. 촉박한 시간 속에서 아버지만 두고 나만 살자고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으나 위급한 상황에 부모는 강한 것 같다.

 

나는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아버지는 뚜껑을 덮고 좀 떨어진 담벼락에 기대어 앉았다. 한명이 앞에 서고 열 명이 두 줄로선 군대가 군화 소리로 철컥철컥 위협을 하며 열을 지어 아버지 앞에 섰다. 여지없는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아버지가 걱정되어서 뚜껑을 살짝 열고 동태를 살펴보았다. 자칫하면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병원에 실려 온 시체처럼 목격해야 할 사태가 아니던가! 앞에선 지휘봉을 든 대장이 아버지의 턱에 지휘봉을 바싹대고 고개를 치켜세웠다. 옆에서 남은 병사들이 가방을 뒤지고 있는데 소지품은 모두 면 기저귀와 약 봉지들 뿐이었다.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야? 죽고 싶나? 광주는 진압되었다."

아버지는 아주 침착하면서도 가늘게 대답을 하셨다.

"대학병원에 입원중인데 총 맞은 사람이 너무 많이 들어오는 바람에 강제 퇴원을 당해서 집에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기저귀와 약봉지들을 놓고 말을 주고받더니 다시 아버지께 총을 들이댔다.

"보호자 없나? 기저귀는 뭔가? 보호자가 아기를 동행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아버지는 다급하게 허리를 풀어 착용한 기저귀를 빼서 보이며 대답하셨다.

"제가 설사환자입니다. 제가 설사로 탈진을 해서 가죽만 남았잖어요? 가족이 아직 강제퇴원 된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더니 아버지의 턱에 숨이 차도록 괴고 있던 지휘봉과 총부리를 놓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거리를 배회하지 마라."

다시 열을 짓더니 열한명의 군인은 텅 빈 거리를 장악하며 행군했다. 그렇게 해서 스물한 살 나이의 젊은 청춘인 딸을 아버지께서 구하셨다. 당시 군대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젊은 대학생들을 더욱 심하게 공격을 했기 때문이다.

 

숨어 숨어서 월산동 집까지 걸어서 갔으나 5월27일에는 어머니의 대작전이 이루어졌다. 모든 통신과 언론이 두절된 상태에서 시골집의 어머니는 고통이었다. 입원중인 남편과 큰아들과 임신 중인 큰며느리와 손녀 그리고 막내딸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는 어머니는 결단을 내리셨다. 죽더라도 가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다. 광주까지 가는 수단을 돈으로 흥정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도 모두 거절당하였다.


당시는 지금처럼 개인소유의 교통수단이 그리 흔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집에 4.5톤 트럭이 있었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군대의 시선을 받지 않고 가족을 실어 나를 운송수단을 생각하신 것이다. 마침 언론에서는 28일의 대학살을 공공연히 경고를 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28일 안에 가족을 빼와야했던 것이다. 27일 새벽 컴컴한데 어머니께서 스카프로 머리를 칭칭 동여매고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을 하고 들어오셨다. 광주의 가족들은 놀라고 말았다.

 

어머니가 타고오신 것은 돼지장사 오토바이였다. 돼지를 한 마리에서 두세 마리까지 싣고 다니며 도축을 해서 파는 돼지장사 오토바이를 목숨과 돈을 걸고 흥정을 한 것이다. 급하게 피란 짐을 쌌다. 먼저 환자인 아버지를 싣고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보호해서 뒤에 타시고 극락강 줄기를 타고 송정리까지  옮긴 후에, 한 번 더 오토바이가 와서 나와 새언니와 조카를 송정리까지 가서 내려주면 큰오빠는 자전거에 짐을 싣고 송정리에서 만나기로 작전을 짰다. 우리는 그날 그렇게 광주를 탈출했다.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그 해에 돌아가셨다. (눈물 나네.) 그리고 나는 살아남아서 나의 과거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새벽안개 자욱한 극락강가는 시골에서 광주로 유학을 보낸 부모들이 자식을 찾아가는 인파와 피난민들로 가득했다. 집에 가는 자식과 자식을 찾으러가는 부모가 어쩌다 만나면 강가에서 이산의 상봉이 소리도 없는 흐느낌이 되었다. 모든 도로가 군대에 의해 통제 되었으므로 잡풀이 무성한 극락강 줄기는 이름 그대로 극락이었다. 그렇게 아픈데 그렇게 아픈데 우리는 적색분자로 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 후유증을 앓고 살아간다. 지금도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더 많은 행불자들은 흔적조차 원통하다.


우리는 그때 탄핵을 하자고 했다. 탄핵은 그때, 바로 그때, 꼭 했어야한다. 살인자들이 대통령 할 때 탄핵하자고 하면 감옥을 갔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다. 억울해도, 억울해서, 억울하다, 고 하는데 국회는 탄핵을 하지 않았다. 절대로 안했다. 언론도 음해의 동반자다. 이제는 인터넷 시대다. 또한 휴대전화기 시대다. 전 국민이 하나로 뭉칠 수 있다. 그때처럼 누구를 음해하라고 해도 속지 않을 수 있는 저력을 국민 스스로가 마련해서 살고 있다. 살인자도 돌아가면서 대통령 시켜주고 그 자식들까지 뿐만 아니라 후손대대로 퍼먹고 살게 해준 국민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살인자도 아닌 대통령을 살인자들과 야합한 족속들이 괴롭히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나는 손이 아파도 한손으로라도 나의 묵상글을 쓴다. 배신했던 언론은 이제 정신 차리고 국민의 아픔을 똑바로 전해야한다. 이 나라에 다시는 살인자들의 강권이 살아 춤을 추어서는 안 된다. 이 나라는 정치가 국가를 살린 적이 없다. 국민이 국가를 살려낸 나라다. 정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붉은 옷을 입고 다시 광화문 앞으로 집결하라. 월드컵광장 조성으로 서울시청 앞이 공사 중이니까!

다시 광화문 앞으로 집결하라. 집결하라.

대~한 민국! 짜자~자 작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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