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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 24일 야곱의 우물- 요한 4, 5-42 /렉시오 디비아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24 조회수852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요한 4,5-­42)
 
 
 
 
요한복음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6절) 예수께서 피로에 지쳐 야곱이 팠을 것이라 전하는 우물가에 주저앉은 그 시간은, 빌라도가 예수께 사형을 선고한 시간(19,14 참조)을 암시합니다. 그분은 목마르셨고, 한 여인에게는 물동이가 있었습니다. 다만 그뿐이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해묵은 적대감, 여자는 사람도 아닌 시절 남모르는 여인과는 공공연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엄격한 규율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을 두고 집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할 정도입니다. “나 자신이 혐오하는 민족이 둘 있고 셋째 것은 민족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은 세이르 산에 사는 자들과 필리스티아인들 그리고 스켐에 거주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다.”(50,25-­26) 그러나 예수님은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7절) 하시며 이 편협한 관습을 무시하십니다.

 
일상적이지 않은 대화가 그들 사이에 오고 갑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것을 말씀해 주시지만 여인은 인간적 차원에서만 알아듣습니다. 물을 마시고 계시면서 계속 물 타령이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14절) 요한묵시록에서도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21,6)고 하십니다. 갈증을 호소하는 사람은 곧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고여 있는 물이 아닌 샘솟는 물, 영원한 생명이 필요합니다. 니코데모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 여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요한복음 특유의 양식인 말이 안 통하는 대화 방식과 몰이해는 오히려 대화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15절) 여인은 선입견 때문에 여전히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곧 우물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여인을 위해 그의 과거를 들추어 대화를 이끌어 가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16절) 예수님은 여섯 남자를 전전했던 이 여인의 삶에 분노하지 않으시고 내적 자유와 아량을 보여주십니다.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19절) 여인은 마침내 거짓의 껍질을 깨고 참된 자기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분을 알아봅니다. 재차 예언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인정하신 예배 장소에 관해 질문합니다.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21-­23절) 예수님은 기도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영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예배 장소 운운하며 외적인 규정을 실천하는 것으로 하느님께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유다인들이나 사마리아인들의 착각을 바로잡으십니다.

 
근본적인 목마름은 하느님의 말씀인 생명수로 해갈됩니다. 이제 목말라하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그 여인이며, 인간의 내적 갈증을 풀어줄 분은 바로 여인 앞에 서 계신 분입니다. 물동이를 버려둔 채 그다지 자신을 환영해 주지 않을 마을 사람들한테로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달려간 여인,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었던 여인, 그녀는 이제 자신의 체험을 전하고 사람들을 예수께 불러 모으는 그리스도의 메신저, 사도가 됩니다.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39절) 그녀는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됩니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에서 영원한 목마름을 해소한 이의 생기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청하여 예수님은 거기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는데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서입니다. 나중에 그리스인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였고, 베드로와 요한도 그들의 믿음을 확인합니다(사도 8,4-­25 참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일화나 말씀의 수효는 적은 편이나 그 내용은 장황하고 상세합니다. 오늘 복음의 두 분 대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로 오해받을 소지가 많았음에도 도란도란 표주박을 주고받으면서 진지하고 긴 대화를 나누십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까지 다 털어놓게 되었지요. 말씀을 경청하고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분께 향한 여인의 믿음은 자라났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마음이 열렸고, 마음이 열리자 충만한 믿음에 이르러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영원한 생명’, 곧 생명을 주고 생명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일이요, 예수님의 일임을.

 
잘 들어주는 사람 앞에선 이야기가 술술 나옵니다.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 가슴 아픈 가족사, 이런저런 골칫거리 등 묻지도 않은 말까지 다 나옵니다. 한바탕 털어놓고 나면 후련해집니다. 딱히 해결책을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상황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다시 정신이 맑아지고 살아볼 용기가 생깁니다. 우물가에 앉아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일곱 번째 남자를 만나 팔자 한번 고쳐보렵니다. 부어도 채워도 밑 빠진 독 같은 제 영혼에 예수님의 우물을 달고 살아야겠습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14절),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15절)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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