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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원에 이르는 용서는 무엇인가 [ 용서의 남용 ]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25 조회수436 추천수0 반대(0) 신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6,36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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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나 홀로 구원받고 , 나 홀로 거룩해져서 무엇 하는가 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자칫 남용하기도 쉽습니다. 근래에 <나 홀로 수덕주의>라며 자주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용서'는 자신의 수덕 행위에 의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렇듯 '용서'의 은총은 '위로부터의 영성' 곧, 인간의 수덕 능력에 의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나 홀로 거룩해서 나 홀로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전적으로 개인간의 문제 안에서는 이것이(용서가) 가능한 논리이기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학대받는 자들에게, 묶인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은혜의 말씀이 되십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 예수님의 가르침은 나 홀로 수덕주의에 의한 자기 해방을 두고 '은혜의 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 학대받는 자들, 묶인 자들의 해방자이십니다. 기득권자의 친척이라는 명분 아래에서 비리와 부패를 일삼는 자들을 용서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래로 내려오신 '인간의 구원자'가 아니신 것입니다.용서는 남용할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다음은 복자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의 가르침의 일부입니다. (출처; 구원에 이르는 고통)

구원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고통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 아들을 주셨습니다.  "주신다"는 말씀 자체가 이 해방은 외아들 그분에 의하여 그분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며 인간을 위한 사랑, 구원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적 고통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고통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차원은 구속의 차원입니다. 외아들 그분이 인류에게 주어진 것은 일차적으로 결정적인 악에 대항하고 결정적인 고통에 대항하여 인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의 사명을 띠고 보내심을 받은 하느님의 아드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악을 바로 그 뿌리에서부터 쳐부수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이 악의 뿌리들은 죄와 죽음이라는 땅 속에 뻗쳐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구체적인 죄들의 결과로 판단하는데에는 크게 조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통을 인간 역사에서 개인적 행동과 사회적 과정의 죄스런 배경에서 분리시켜 놓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 고통의 근저에는 죄와의 복합적인 연루관계가 있다는 비판 기준을 배격할 수 없다는 것도 진실인 것입니다.

"영생"은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결정적인 행복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첫째로는 원죄와 더불어 비롯하여 악의 영향력 아래 인간의 역사 안에 뿌리를 내린 죄의 지배를 불식하시며 그 다음으로는 인간에게 성화은총 속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의 세계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고통 속에서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육신의 고통이든,영혼의 고통이든 인간의 모든 고통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을 바로 당신 자신에게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고통의 세계에 다가오심을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 오해를 받는 일을 겪으셨을 뿐아니라 점점 더 소외를 당하고 적의에 둘러싸이게 되셨으며 자기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음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며 죽음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상 게시자글 참조>


이처럼 '구원에 이르는 용서'를 말할 수 있다면 예수님 처럼 고통 당하는 보잘것 없는 이들의 세계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 때 하느님의 선물(은총)이 주어지고 올바른 용서에 대한 깨달음도 주님께서 주실 수 있습니다. 용서는 인간이 남용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신 그분의 전적인 선물인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작은 이들이) 고통을 받는데 나 홀로 거룩하고 나 홀로 구원을 위해 나 홀로 수덕한다고 해서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구원은 믿음의 순종입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믿고(믿음) 그 믿는 바를 실행(순종)하는 <믿음의 순종>인 것입니다.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 내려와서 상기의 교황님 가르침과 같이 인간 고통에 그리스도적 구원의 고통으로 일치가 되어져야 '구원에 이르는 용서'가 무엇인지 참된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 마리의 길 잃은 양을 통하여 99 마리와 함께 곧, 완전한 100 마리 공동체의 구원(평화와 행복)을 이루십니다. 1 마리가 길을 잃음은 그 근저에는 즉, 길을 잃게 한 죄스런 배경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의 진리를 착각하게 하는악령은 인간의 고통을 일으키게 한 '죄스런 배경' 마저 용서라는 이름으로 지나쳐 가게 합니다. 이리하여(용서의 남용) 인간 전체의 불행이 싹트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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