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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마라." - 2008.2.17 사순 제2주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17 조회수503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2.17 사순 제2주일                                                
창세12,1-4ㄱ 2티모1,8ㄴ-10 마태17,1-9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새벽 공기가 겨울답게 매우 차가웠습니다.
차갑지만 맑고 깨끗한 기운이 마음을 상쾌하게 하니 참 좋았습니다.
 
어느 분의
‘이런 추위는 쌈박해서 좋다.’는 실감나는 말마디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새벽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에 붉게 물든 하늘이
마치 주님 사랑에 기쁨으로 물든 마음을 보는 듯했습니다.

부활시기만이 아니라 사순시기도 기쁨의 시기입니다.
결코 침울하게 지내는 사순시기가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이미 붉게 물들기 시작한 우리 마음들입니다.

그저께 금요강론을 준비하면서
새삼 사순시기가 기쁨의 시기임을 깨달았습니다.
 
보통 금욕 수행에 전념해야 할
우울한 잿빛 사순시기로 착각하기 십중팔구인데
베네딕도 규칙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부 73장으로 된 규칙 중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라는 49장 안에만
오직 '기쁨(gaudio)'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온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선한 충격인지요.
 
구체적으로 인용합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을 지니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이미 부활의 주님을 기다리며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사는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하여 우리의 모든 수행들을 의무로 ‘무겁고 어둡게’ 가 아닌,
기쁨으로 ‘가볍고 밝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행은 짐이 아니라 기쁨의 표현입니다.
주님 역시 기쁨의 수행을 바라신다는 사실은
다음 단식에 대한 말씀에서도 잘 들어납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너희는 단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기쁨의 기름을 바르고 새로움으로 얼굴을 씻고 단식하라 하십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단식 하느니 차라리 기쁘게 먹는 것이 보기에 좋습니다.
 
안 먹고 교만한 것보다는 먹고 겸손한 것이 좋다는 말도 같은 이치입니다.

기쁨과 유머가 영성의 표지이지
심각하고 우울한 것은 결코 영성의 표지가 아닙니다.
 
이런 기쁨은 상황에 따른 변덕스런 기쁨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의 샘이신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솟아나는 항구한 기쁨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한 번 뿐이 없는 선물 인생, 기쁘고 희망차게 살아야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절망은, 슬픔은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끝장내셨는데 어찌 슬퍼하거나 절망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드러내주신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사순시기, 부활의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에
잔잔히 물결치는 우리 마음들이어야 합니다.
 
슬퍼하거나 절망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은 없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래서 영적 체험을, 정기적인 피정을 필요로 합니다.

낮 동안 써버려 소모됐던 핸드폰의 전지를
밤 동안 충전시키는 이치와 같습니다.

주님의 생명과 기쁨으로
우리 마음을 충전시키기 위한 구체적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모든 피정이 의도하는 바도
우리 영육을 주님의 생명과 기쁨으로 충전시키는 데 있습니다.
 
왜 두렵고 불안합니까?
왜 마음이 황량하고 메마릅니까?
 
마음의 전지약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너무 밖의 활동으로만 치달았기에,
또 외적인 것들에 마음을 많이 뺏겨 그렇습니다.
 
외적으로 편하고 쉽고 빠른 것을 추구할수록
내적인 삶은 천박해질 수뿐이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역시 사람인지라 일상의 삶에 지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 지친 세 제자의 영육을 충전시키고자
높은 산에 올라 가셔서 몸소 침묵 피정을 지도하시며 자신도 피정을 하십니다.
 
깊은 관상기도 중에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진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는 감격에 벅차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아마 베드로와 나머지 두 제자의 주님 변모 체험은
이들의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에서 내적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도 하느님은 친히 아브람의 피정을 지도하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앞길을 제시해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밖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아브람만이 아는 내밀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역시 아브람의 고단한 순례 여정 중에
이 하느님 체험 역시 활력의 샘이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너는 복이 될 것이다.’라는 선언에 아브람은 얼마나 고무되었을까요?

사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 아브람처럼 복 덩어리 존재들입니다.
우리 역시 알게 모르게 이런 저런 하느님 체험들이 축적되면서
복된 존재로 변모되어 가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샘솟는 내적 힘입니다.
 
이 내공의 내적 힘이 외적인 것들의 유혹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를 제자리에서 제 모습,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게 합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하느님 체험에서 오는 내적 힘입니다.

산 피정을 마치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불암산 요셉수도원 성전에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손수 우리의 피정을 지도해 주신
주님의 결론과도 같은 두 말씀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불이요 우리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오늘 본기도에서처럼 주님의 말씀으로 영신의 눈이 맑아져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할 때
무디어졌던 돌 심장도 살 같은 부드러운 심장이 됩니다.
 
우리 앞에 환히 열리는 주님의 길입니다.

이어 두 번째 말씀도 좋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주님의 피정 주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상황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라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든 절망에서 벌떡 희망으로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태의 잠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에서 빛으로 벌떡 일어나 복된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자 모두 나태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기쁘게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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