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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분노와자비/영적성장을위한감성수련/문종원신부
작성자조연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17 조회수490 추천수3 반대(0) 신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은 자비도 베푸시지만

                               노하시기도 하신다(집회 5,7).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이 지니는 모든 열망에 함께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포용력 있는 하느님의 마음에는 열정이 있었으며,

이 열정은 사랑의 대가로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홍수의 이야기 안에서 하느님의 마음은

실망감으로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하느님은 땅위에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셨으며,

하느님의 그 마음 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창세 6,6).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경험 하시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함께 한다는 것은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을 나누고,

친교뿐만 아니라 고독을 맛보며,

영광뿐만 아니라 고뇌에 다가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서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은

분노와 자비 모두를 지니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열망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격렬한 상호 관계를 통해 설명됩니다.

하느님께서 화를 내시는 장면은 다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야훼께서는 크게 화를 내시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적에게 침략을 받아 노략질 당하게 하셨다.

또한 둘러싸고 있는 원수들 손에 팔아 넘기셨으므로

그들은 도저히 원수들과 맞설 수가 없었다”(판관 2,14).

 

 “나의 결정이 국가를 모으는 것이고 왕국들을 닮게 하는 것이고

나의 영을 그들에게 부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끓어오르는 화가 나의 열망의 화안에서

모든 지구상에 보여진 덕이다”(예레 3, 1-8).


  성서는 하느님의 분노를 그 백성들의 변덕스런 행동으로 인해

초래된 하나의 응답으로 기억 하지만,

그러나 이런 분노는 자비와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의 자비는 온유하고 부드럽다.

나는 나의 화를 지속하지 않을 것이다”(호세 11, 8).

“야훼는 부드럽고 자비하시니, 천천히 화내시고, 사랑이 지극하시며,

하느님의 화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시편 103).


 흔들리지 않는 신성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이 화를 내시는 것만큼이나

많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분노는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특권적인 위치로 나타납니다.

예언자들은 변덕스러운 이스라엘의 행동에

경고를 보내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주 화를 냈습니다.


 실제로 화를 잘 내는 성격인 예레미아는

“나 야훼가 선언합니다.

나는 사람과 짐승, 들에 서있는 나무, 땅에 서있는 곡식을 가리지 않고

이 땅위에 나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리라.

아무도 타오르는 나의 분노를 끄지 못하니라.”(예레 7, 20)

 

라는 말로 분노하시는 하느님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야훼의 노여움이 속에서 부글거려

저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예레 6, 11)

라는 말로 야훼의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은

종교적 공동체 안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대변했습니다.

왕이나 사제들의 권위를 견제하면서 예언자들은 정절, 정체성,

그리고 변화에 대한 고통스런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스라엘 내에서 진정한 분노를 야기시켰습니다.

예언자들이 심하게 무시되거나 폭력에 의해서 침묵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들의 소명은 신앙을 선조들 사이에 있었던

명예로운 분노의 발생 장소에 대한 증거물을 제시했습니다.

분쟁과 갈등이 발생했을 때,

그들이 계속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이러한 장소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성서는 주님을 화를 내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하느님을 화가 나서 밖으로 강하게 표현하는 분으로 그립니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처럼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분임을 알고 있지만,

성서는 때때로 인간이 하는 식으로 하느님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화가 그 자체로는 죄가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서는 하느님은 거룩함 자체이시기 때문에

화를 내시지 않는 분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를 때로는 연민의 정으로 가득찬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

동시에 종종 분노하시는 분으로 회상합니다.

예수님 역시 예언자들의 긴 계보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셨고 잘못된 어떤 것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화를 내셨습니다.

 

마르코 3장 1-5절, 요한 2장 13-15절, 마태오 2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화가 나셔서

그것을 숨김없이 표현하셨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다음의 성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팔고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쫒아 내시고

환금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마태 21,12).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 하셨다”(마르 3,5).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모였던 사람들에게 ‘일할 날이 일주일에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하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하고 말하였다.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 이 위선자들아, 너희 가운데 누가 안식일이라고 하여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지 않느냐?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십 팔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어있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 하여 이 여자를 사탄의 사슬에서

풀어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냐?’ 하셨다”(루가 13,14-16).


 예수님은 우리처럼 스스로 옳다고 하는 이들이나 위선자들 때문에

화를 내시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화를 내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친근감 있는 화”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바로 전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면서

신뢰하는 가까운 세 제자들에게 수난 받으시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자 베드로가 예수께 가지 말라고 권할 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구나!’ 하고

꾸짖으셨다”(마태 16,21-23)

 

라고 하시면서 갑자기 당신의 화를 폭발시키셨습니다.

친한 친구를 HARSH의 언어인, 악마로서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화는 어려운 결정의 순간에 그가 얼마나 유약한 가를 잘 말해 줍니다.

두려웠으나 결정했고,

베드로가 그에게 잘못된 조언을 제공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당신이 결정한 것을 수행하기 위해 그의 친구들을 둘러 보셨습니다.

예수의 타오르는 분노는 결국 이 유혹을 물리치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따르도록 그를 도와 주었습니다.


 화에 대한 반응은 예수님께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신자 공동체가 잘못을 수정해야만 했을 때

화가 나서 편지를 썼습니다(갈라디아서 참조).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화를 낸 것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그의 자녀들은 화가 나면 그것을 숨김없이 표현하였습니다.

이렇게 성서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면

화를 낼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골로사이 3장 5-8절, 에페소 4장 31절, 갈라디아 5장 20절을 보면,

화를 내놓고 표현하는 것을 금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한 구절을 단편적으로 발췌해서 보게될 때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성서가 전해주는 하느님의 격노에 관한 증언, 예언자들의 분노의 증거,

화난 예수의 이미지 들은 분노가 윤리적인 실패 이상임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분노는 거부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성서는 증언하면서

시편 저자나 바오로 사도를 통해

 

“화를 내라. 그러나 죄는 짓지 말아라.”(시편 4,4; 에페 4,26)

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를 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화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기에

화를 주의 깊게 다루라고 경고합니다.


 “함부로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다.

제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탈취하는 것보다 낫다”(잠언 16,32).

“여러분은 알아두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또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마십시오.”(야고보 11,19- 20)

 

의 성서 말씀은 화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화를 천천히 내라고 하면서

화를 피하기보다는 화를 다스리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 또한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화를 올바로 내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적개심을 품고 살인을 유발하는 화를 금하시면서

올바른 화조차도 조심해서 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성서는 화가 항상 나쁘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통제할 수 없거나 오히려 통제당하는 화, 또는 싸움이나 불화를 일으키는 화,

미움이나 원한을 사는 동기가 되는 화를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화를 올바르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숙고해야 한다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야훼께서는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며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넘치신다.

끝까지 따지지 아니하시고

앙심을 오래 품지 않으신다(시편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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