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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28) 혼자 본 공현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13 조회수468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4년1월4일 주일 주님 공현 대축일 ㅡ이사야60,1-6;에페소서3,2-3.5-6;마태오2,1-12ㅡ

 

       (28) 혼자 본 공현

                         이순의

                  


ㅡ아기ㅡ

가끔씩 아들이 어려서는 어미의 반 강제 집행과 아들의 순응이 반씩 합해져서 둘이서 곧잘 주변의 성당들을 성지순례 삼아 돌아다니곤 했었다. 가난이 이유이기도 했지만 성지 순례를 꼭 돈을 들여서 먼데나 외국을 나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당은 건축과 미술, 조각과 느낌, 그리고 본당신자들의 신앙의 모습까지 드러내 줌으로서 종합예술에 가까운 가르침을 줄 거라고 생각했고, 자식이 어미의 품을 벗어나기 전에 할 수 있는 신앙교육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결과에 대해서 나는 모르지만 그분은 알고 계실 거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나는 꼼꼼히 살피며 다녔고 아들은 장님 굿 보듯이 듣고 보며 그냥 따라 다녔다. 감실의 모양을 보며 짓는 이의 영감을 보려 했고, 제대의 형태를 보며 봉헌 되어질 예물을 떠올렸고, 유리장식이며 성당 곳곳에 놓인 장식품뿐만 아니라 화장실과 마당에 모셔진 성상들, 그리고 똑같은 형태를 이룰 거라고 생각했던 세 칸짜리 고백소들이 본당마다 제각각의 구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교회는 주의 공현 대축일을 기점으로 바깥출입을 하게 되는 세례축일을 맞으면서 아기예수를 모시는 구유를 회수하게 된다. 주중에 외출하기가 어려운 나로서는 오늘을 놓치게 되면 올 해의 구유 순례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들은 예전처럼 따라 나서지 않았다. "해마다 보아도 성당은 모두 똑 같다" 는 이유다. 그러나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에 감시받지 않고 혼자서 실컷 즐길 수 있는 pc 게임을 선택한 것을 엄마는 알고 있다. 예전에 미리서 했던 순례에 대한 감사를 절로 느끼며 혼자서 구유에 누운 아기를 뵙는 여행길에 올랐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없지만 나의 정성된 마음을 안고 나선 것이다. 여남은 성당을 버스도 타고 전철도 타고 택시도 타면서 혼자만의 기쁨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느라고 바빴다. 한 점 혹을 집에 혼자 두고 온 불안감도 있었지만 동행이 없는 나 혼자서 점심을 먹겠다고 음식점에 앉을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빵 한 봉지를 들고 강행군을 하는데도 시달리던 기침조차 잠시 긴장하고 멈춰 섰다.

 

올해의 마구간들은 전반적으로 예년에 비해서 약간은 검소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거의 모든 본당들이 예년에 쓰던 소품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각 본당이 가지는 이미지의 변화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주로 달라지는 것은 주변에 장식하는 꽃꽂이나 소품들의 추가와 성당 곳곳에 얼마만큼 화려한 장식을 놓아서 성탄의 분위기를 고조 시키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올 해는 사회적 현상인 불경기를 면치 못 하는 안타까움을 반영이나 하듯이 전체적으로 소박함을 화두로 삼고 있었다.

 

꾸며졌던 곳을 간소화 하거나 놓여 질만한 곳을 제외시키거나 해서 전체적으로 시달리는 민초들의 마음에 부담을 주는 장식을 삼가하고 있었다. 교회 전례를 담당하는 봉사자분들께서 시대의 징표를 잘 읽었으리라는 기대감도 있었고, 사제회의나 수도자회의에서 어려운 시대를 외면하지 말자는 협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순례였다.  

 

그렇다고 해서 본당마다 꾸미고 있는 마구간의 정성을 결코 가벼이 말 할 수는 없었다. 예년에 사용했던 것을 같은 자리에 놓더라도 그 자리에 놓은 봉사자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봉사자는 언제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혼신의 정열을 쏟아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만큼 영감의 끼를 소신껏 봉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적 헌신의 반복된 봉헌들은 교회의 전통을 발전시키는데 큰 기초를 놓을 뿐만 아니라 전례문화의 뿌리를 다양화 시키면서 교회의 발전과 인류의 예술을 승화 시키는데 역사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남겼던 것은 부인 할 수 가 없는 사실이다.

 

일 년의 전례는 변동 없이 수 세기를 반복하고 있다. 한 해 동안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행적을 고스란히 살아 내야하고, 그것을 해마다 반복하면서 신앙의 길을 다지는 것이다. 말씀의 전례 또한 3년을 주기로 똑 같은 성서가 봉독 되고 있다. 이러한 되풀이의 연속성 안에서 전례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난제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 하는 데는 하느님은 사람이 있는 모든 곳에 함께 계시는 보편성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전례의 큰 틀은 성서 안에서 벗어 날 수는 없으나 그 표현의 방법에서는 시대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사회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진보하기도 하지만, 도농 간의 격차는 물론이고, 지역 간의 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화려함과 소박함의 대결적 양상을 확연히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본당에서 봉사하는 구성원들 간의 신앙의 자질에서 현격한 차이가 드러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과제이며, 그것들을 수용하는 교우들의 시각의 차이도 제각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초대하고자 하는 그 자리에 그들의 형편과 여건에 동등한 모습으로 언제나 어느 때나 응답 하신다는 사실이 그 무엇 보다 중요한 희망이며, 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 인도하고, 모두께 똑같은 사랑을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공현이 주는 의미는 가장 낮은 자로 오신 아기가 먼 이국으로 별을 보내서 이방인들을 초대하고 드러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 주님의 공현을 맞아 순례를 하면서 내가 초대받은 화두는 <아기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기뻐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기께서 탄생하시고, 2천년 동안 지내 온 전례를 기뻐하고, 앞으로 또 2천년 동안 지내야 할 반복에 대해서도 기뻐하면 되는 것이다. 각기 다른 형편대로 마련한 마구간에 오신 아기에게 수 없이 많은 인사를 드리면서, 로마의 바티칸에 지어진 마구간과 지금 내 앞에 지어진 마구간이 다를 지라도, 서울의 명동성당에 지어진 마구간과 작은 섬 마을의 공소에 지어진 마구간이 다를 지라도, 주님은 똑같은 기쁨으로 오셨다는 사실이 은총인 것이다.

 

구세주의 탄생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유한 사람에게도, 병든 사람에게도, 편안한 사람에게도, 어린이에게도, 늙은이에게도, 젊은 청춘에게도, 모두 모두에게 똑같이 드러내 보이시는 축제였던 것이다. 환한 대낮에 별의 인도가 아닌 태양의 인도를 받아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신지 찾으러 다닐 때마다 아기는 한국의 왕! 우리의 왕! 나의 왕으로 오셔서 그 자리 그 마구간의 구유 안에 그대로 누워 계셨다. 토실한 아기는 아주 귀엽고 너무나 나약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가는 곳마다에서 잠들어 계셨다. 강보에 싸여서!

 

혼자 나그네 된 나는 정성된 마음을 예물로 드리고 왔다.

참! 교통비로 구렁이 알 같은 이만오천원이나 봉헌하고 왔다. 아기예수님 꼭 치부책에 적어 놓으세요.

 

ㅡ이를 보고 그들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마태오2,10-11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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