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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월 1일 야곱의 우물- 루카 22, 14-23,56/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01 조회수595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필자가 묵상한 구절을 중심으로 싣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그리고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러자 사도들은 자기들 가운데 그러한 짓을 저지를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서로 묻기 시작하였다.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22,14­-23,56)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영어로는 ‘Passion Sunday’라고 합니다. Passion은 고통이란 뜻보다 ‘열정’이란 뜻이 더 우위입니다. 인간 사랑에 대한 열정이 수난이 된 것이니, 우리의 죄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성금요일’은 슬픈 금요일이 아니라 ‘Good Friday’인 것이 마땅합니다.
온 인류를 새로이 낳고 키우기 위해 하느님과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시는 사랑의 절정, 거룩한 주간의 시작입니다.

때는 축제인 무교절.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제거해야 할지 그 방법을 강구하려 혈안이고,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장한 내면의 감정과 의지를 나타내십니다. “간절히 바랐다”, “다시는 먹지 않겠다”, “결코 마시지 않겠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은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22,15) 이렇게 간절히 바라신 이유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우선 이 식탁자리는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제자들로서는 예년과 같은 파스카요 축제요 식사자리이겠지만 예수님으로서는 죽음을 앞둔 고별의 자리, 남겨주실 마지막 말씀을 꼭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둘째,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역사적 사건인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계약으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 된 옛 계약을 새로운 의미로 완성하고자 하시기에 이 자리가 반드시 파스카 음식을 나누는 자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시며,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하시고, 또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이다.” 하셨습니다. 곧 구약의 파스카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음식인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최후만찬 말씀과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몸을 주시는 생명의 양식이요, 피로써 맺는 새로운 계약의 음식이 됩니다. 이 계약으로 신약의 새 백성이 탄생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고난을 겪기 전에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라셨고,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식탁자리는 친교를 이루는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중요한 일들, 생일·결혼·회갑·장례뿐 아니라 명절, 심지어 사업에도 빠질 수 없는 것이 식사입니다. 땅을 일구고 곡식을 추수하기까지 그리고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사람의 땀과 노고와 정성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땅과 햇빛과 공기와 물과 바람 등을 주신 하느님의 섭리도 함께 배어 있기에 음식을 함께 먹는 식탁은 사랑과 생명을 나누는 자리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식탁자리에서 말씀하시고 친히 음식이 되시어 우리에게 사랑과 생명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우리의 먹이가 되실 그분은 ‘빵집’이란 뜻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소들의 먹이통인 구유에 눕혀지셨습니다. 그리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초대하는 식탁자리에 앉아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만찬자리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17,23)

 

 

이제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지낼 수 없고 십자가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현존하시며 그것을 먹는 제자들과 일치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사랑의 현존으로 끊임없이 제자들을 양육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 예식을 ‘주님의 식탁’, ‘주님의 만찬’이라 부르며 행했습니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22,21) 이 사랑의 식탁에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배반자도 함께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박해당하던 시대에도 밀고자는 대부분 교우들이었습니다. 이 괴로움을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원수가 저를 모욕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참았을 것입니다. 저를 미워하는 자가 제 위에서 거드름을 피운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그를 피해 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 내 동배, 내 벗이며 내 동무인 너, 정답게 어울리던 우리 하느님의 집에서 떠들썩한 군중 속을 함께 거닐던 우리”(55,13*­15)였다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이 식탁에서 그에게도 빵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도 피를 쏟아부어 주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요한복음 주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능한 분과 식탁에 앉게 되거든 네 앞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라. 그리고 너도 그만한 식탁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라.’ 능하신 분의 식탁이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데가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있는지 살펴라.’는 말은 위대한 은총의 가치를 올바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너도 그만한 식탁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셨듯이 우리도 또한 우리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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