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왜 싸웠을까? / 이인주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30 조회수675 추천수4 반대(0) 신고

격전


야! 이 사람들아 내가 당신들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당신들이 생각하듯이 난 그렇게 막 되어 먹은 사람도 아니고, 나는 이방인도 아니며, 그렇기에 당신들이 취급하는 그런 개만도 못한 사마리아 사람도 아니란 말이야.

 

그리고 내가 사마리아 사람들과 살아봤는데 그들은 당신들처럼 그렇게 비겁한 그런 사람들이 아니야. 이제라도 좀 당신들 속을 보이고, 사람과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그런 새로운 문화를 만들자고, 그랬더니 너 날뛰고 있는 유대인들이다.

 

저 놈을 잡아라, 잡아 죽여라!!! 날 리가 났다. 진짜 미친개는 누구인지를 모르겠다. 어찌하여 큰 잘못이 없는데 몽둥이를 들고 개잡으려 하는 것인가?



이렇게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는 이 정도로 살벌한 관계로 되어져 가고 있었다. 하느님 이 일을 어쩌면 좋데요? 물론 유대인들의 못 된 점은 지금도 유명하다. 유대인들이 주변국가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것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왜일까?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천자, 즉,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하늘을 찌를 듯한 우월감과 자긍심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며 자신들의 신원을 까뭉개려 하니 그도 그럴만하다 싶기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자신들을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것을 수행했는가? 그리고 그 시대에 그럴만한 이적을 보인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허긴 그것이 문제로 될 수도 있는 것. 너무 튀는 사람이 나왔으니, 그들도 도전도 되고 겁도 나지 않았겠는가? 위협받는 자신들의 신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예수는 어떻게든 없애 버려야 할 존재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니 예수의 신원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모른 척 하며 제거할 구실을 찾고 있는 중이다. 우리도 제발 살아가면서 이런 추한 모습은 보이지 말자. 제발 똥고집 좀 부리지 말자는 것이다.



비유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관계는 격전에 돌입한 상태로서, 우리나라 철도 KTX에 비유하면, 같은 선로 위, 피할 수 없는 한 선로에서 열차가 300km의 속력으로 정면충돌을 하는 그런 모습이며, 또한, 너무 똑같은 평행선의 철길이라 어디를 가도 만나지 못하는 그런 상태의 철길, 아주 냉혹하고 차디찬 찬 겨울의 선로 위를 달리는 만날 수 없는 철로 위의 열차에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관계를 비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더 심하게 표현하면, 폭탄을 가슴에 묻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아랍테러리스트들과의 관계로도 비유할 수 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꼬? 도대체 해결의 답이 나오질 않는다. 이렇게 답이 나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예수님은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래 나를 가져가, 처분해서, 너희들로 하여금 답이 나온다면 나를 먹어라.



사람이 이런 상태에 이르면 겁이 날 리가 없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막가파 형식으로 당신을 다 드러내신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런 모욕도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는 조상을 이제 중년이 될까 말까 한 사람이 나타나 떠들고 있으니, 어찌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지금 예수님이 하고 있는 말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했던, 그 행적들을 조금이라도 참고했다면 이해가 갈 수 있었건만, 예수님의 이적, 기적 행위에 대해선 조금도 검토를 하지 않으려한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려하니 참 답답하다. 참다못해 한 마디 던졌다. 이 인간들아 제발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그 분의 말 좀 들어라. 그러니 우리도 살아가면서 제발 오관을 다 열어 놓고, 제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가운데서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온전히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 옆 사람과의 다툼, 부부싸움, 형제들 간의 의리 상함, 민족 간의 분쟁, 나라간의 전쟁, 지구상의 혼란 등은 스스로 정리 될 것이며, 하느님께서 보호하사 다 제자리를 잡아갈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오는 불화감과 위화감을 통해서 우리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분명 답은 주어져 있다. 문제는 역시 누군가가 먼저 지기를 원하거나, 예수님처럼 다 내어 줄 때만 해결이 가능하다니 참 안타깝다.

 

미리미리 서로 깊게 이해하고 사랑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아주 소중하리라고 본다. 그러면 그 안에서 격전이란 단어는 아주 떠날 것이며, 가장 공동체의 기초단위 인 가정이나 소 공동체에 사랑과 평화가 스며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순시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은총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예수회 홈페이지> 에서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