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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리읽는 성서묵상 [토요일]& 영상으로 초대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23 조회수520 추천수0 반대(0) 신고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 같았습니다.> ▥ 예레미야. 11,18-20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 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 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요한. 7,40-53 그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 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 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 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 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중국의 유명한 인물 가운데 마조(馬祖)라는 선사가 있었습니다. 이 선사는 천하를 호령할 정도의 기개를 가진 분으로 유명하였지만, 그의 조상은 남이 추수한 곡식 중에 섞여 있는 겨를 골라내는 신분이었습니다. 훗날 마조 선사가 성불하여 고향으로 돌아오자 살아 있는 부처를 보려고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노파는 마조 선사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또 꽤나 대단한 스님이 오시는 줄 알았더니만 겨우 마씨네 꼬마 녀석이 아닌가?” 이에 마조는 이렇게 응답했다고 합니다.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에 가지 마오. 고향에서는 도를 이룰 수 없 나니, 개울가의 저 늙은 할머니는 아직도 나의 옛 이름만을 부르고 있구나.”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데에는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노파에게는 살아 있는 부처도 한낱 ‘마씨네 꼬마 녀석’이었을 뿐인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유다인들 에게 한낱 갈릴래아의 한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없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와 성상을 가리는 풍속을 보존할 수 있다. 십자가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을 마칠 때까지 가려 두고, 성상은 부활 성야 예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가려 둔다.>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진리는 바로 내 발 밑에>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이 세상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끝까지 거부하는 부류의 사람들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를 기점으로 인해 예수님은 인간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탄생을 기점으로부터 서양 역사의 기원인 서기(西紀, Anno Domini-A.D)를 세기 시작합니다. 역사 시간에 기원전 이란 말로 통용되는 "B.C" 역시 Before Christ,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처럼 인류 역사 안에 한 획을 긋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진정한 행복을 찾은 사람,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분으로 인해 인생 쫄딱 망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그분으로 인해 인생 종치고 죽음의 길로 접어든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자유 의지를 무척이나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맡기십니다. 인간 측의 자유의지에 일임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죽어도 예수님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존재를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고 끝까지 수용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한 사람, 괜한 똥 고집을 잘 부리는 사람, 뭔가 특별한 것만 찾는 사람, 대단한 것들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입니다. 사실 메시아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데, 천국 문이 바로 우리 일상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진리는 바로 내 발 밑에 있는데, 눈이 너무 높기에,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너무나 물질 만능주의,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쉽게 쉽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단순한 사람, 소박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너무도 자연 스럽게, 거부감 없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님을 주님으로 기꺼이 고백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입술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인 삶으로 응답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분의 일생을 내 삶 안에 깊이 각인시키겠다는 맹서입니다.


    유광수 신부님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요한7,40-53) 이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이시다. "하고 다른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이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서에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사실 복음을 보면 예수님 때문에 많은 논란과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 때문에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복음 전체는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그럼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이들, 예수님한테 불림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 있는가 하면 불림을 받았지만 많은 재산 때문에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간 부자 청년이 있었다. 예수님의 말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병에서 치유된 반벙어리, 귀머거리, 소경, 앉은뱅이, 중풍병자들과 나병환자 등이 있는가 하면 , 병을 고쳐주러 가셨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나자렛의 고향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함하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12)라고 말씀하신 대로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여전히 어둠 속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듣기에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투덜거리며 떠나간 사람들이 있고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6,68)라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 있었다. 서른 여덟 해 동안 누워있던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증언한 반면 오히려 그런 일을 하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셨다고 그분을 박해하는 유다인들이 있었다. 매일 정오 때만 되면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가야만했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는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나오지 않아도 된 사마리아 여인이 있는가 하면 오늘도 마시고 마셔도 또 목마 르고 그래서 우물가에 또다시 물을 길으러 가야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예수님의 영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여전히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오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오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죽었다가 살아난 라자로가 있고 그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그들 가운데에는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고자질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주님으로 알아보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 의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거한 제자들도 있지만 그 중에는 스승 을 배반한 제자도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믿은 제자들 도 있었지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토마도 있었다. 예수님 편에서는 이들도 있었고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미움과 고난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 때문에 출세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서로 갈랐고 논란이 일어났었다. 성 바오로 수도회를 창립하신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님은 "그대는 인류가 어디를 향하고 있고 어떤 방법으로 움직이고 있고,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쇄신되는 과정을 통해 지향하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막중한 문제를 몇 번이나 자문해 보았는가? 인류는 영원으로 흘러 들어가는 거대한 강과도 같다. 과연 인류는 구원받 을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소멸되고 말 것인가?" 라고 자문하셨고 또 우리들도 그런 자문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오늘 날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느 정도까지 복음과 일치되고 있는가? 이 같은 생활이 오늘날 세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활화되고 있는가? 그것이 어떤 점에서 부족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의가 얼마나 전파되었는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안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진실로 기도 드리는가? 우리는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하느님의 참된 자녀들이자 그분의 상속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들의 열매인 생명과 은총의 열매들을 맺어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기도를 실제적으로 보다 훌륭하게 적용하고 있는가? 실제 행동 속에서 대면하는 어려움과 개선점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라고 물으셨다. 우리 자신도 예수님 때문에 서로 갈라진다. 가족이 갈라지고 나라가 갈라졌다. 왜 그럴까?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알기는 알지만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인 진리이신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골베 성인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고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고 진리에 봉사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들을 때에야 비로소 서로 하나될 수 있을 것이다. -유광수 신부-

    오늘 의 묵상 오늘의 복음은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잡아들이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대장금’이라는 TV 드라마를 보면서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임금이 자신을 살려내고 세자와 대비마마를 살려내며 백성들의 역병 등을 고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주치의로 삼겠다고 하자, 조정의 대신 들이 그런 일은 조선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라며 결사반대하던 장면이었습니다. [경국대전]에만 빠져서 더 이상의 것을 볼 수도 없고 보려고 하지도 않던 조선의 대신들에게는 의녀 따위가 임금의 몸을 돌본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경국대전]은 조선의 헌법이라고 볼 수 있는 체계적인 법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세상 이치를 모두 대변해주는 것은 아닌데도 그것에 얽매인 이들에게는 그 내용을 어긴다는 것이 부당한 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교서를 작성한 동부승지는 아무런 죄도 없이 어명을 받들었다는 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동부승지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러한 명을 내린 임금이 잘못한 것인 데도 애꿎은 신하가 유배를 가야했던 것입니다. 정말 얼마나 어리석고 답답한 장면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대의 지도자들도 바로 그러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이 어떠하고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주시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율법을 어기고 자기네들의 생각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단정하고 잡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도대체 우리 율법에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거나 그가 한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죄인으로 단정하는 법이 어디 있소?"(요한7,51)라고 얘기했지만, 이미 마음의 귀를 닫아버린 그들에게는 이런 조언조차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은 저와 다르다는 이유로 함부로 판단하여 마음을 상하게 한 형제에게 용서를 청해야겠습니다. ☆ 기 도 ☆ 주님, 한 가지 생각에 얽매이지 않도록 사고의 폭을 넓혀 주소서. 편협한 생각을 고집함으로써 옆에 있는 이들을 힘들지 않게 하시고, 이웃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게 하소서. 주님, 다른 이의 입을 통해서 건네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우릴 줄 알게 하소서. 아멘.
좋은 글

    ◆ 무소유(無所有) 에 관한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아니다. 궁색한 빈 털털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우리가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늘 갈등 상태에서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저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전체의 한 부분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말과 사회란 말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개개인이 구체적인 사회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든 관계 속에서 서로 얽히고 설 켜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서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이 한때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가지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 갖지 않던 인간관계도 더욱 살뜰히 챙겨야 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당했을 때 도대체 나는 누구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이나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써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소음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침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침묵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그런 복잡한 얽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내 자신이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적으로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가. 의미없는 말을 하룻동안 수없이 남발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서 얘기할 때 유익한 말보다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하여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아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들 자신마저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그 내부는 비어있다 (三思一言) 삼사일언? 세 번 생각한 후에 말하라!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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