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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꽃동네 수사님 걸인체험기
작성자양춘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23 조회수926 추천수11 반대(0) 신고

 

 꽃동네 수사님 걸인체험기


첫날 


   *오전 9時 : 새벽부터갑자기 몰아치는 한파가 절로 어깨를 움츠리게 했지만 5박6일의 여정을 시작하는 우리의 마음은 몇 일전부터 기도로서 단단히 무장한 터라 여유가 있었고 채 녹지 않은 눈길을 걷는 발걸음에 가볍기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뚜렷한 목적지가 없었으므로 앞으로 전개될 미지에 대한 심리적 불안이 작용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은 로사리오를 바치면서 차차 사라져 갔고, 우리는 꽃동네주유소에서 꽃동네에서 봉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울산행 봉고 차에 동승하게 됨을 진정 성모님의 안배하심이라고 믿으며 먼 남쪽 지방을 향하여 고속도로를 달려 여정의 길을 올랐다. 차장을 스쳐 지나가는 경치를 바라보는 것도 즐거움이었지만 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동승한 이들과의 담소는 또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의 신분을 잘 아는 그들은 성소에 대한 많은 관심과 질문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또 우리가 그들과 함께 동승함을 사뭇 기뻐하였고 특히 우리의 여행목적에 대해서 감탄과 함께 우리의 모든 여정을 주님께 의탁하는 지향을 두고 묵주의 기도를 열심히 해주었다.


  *오후 5시쯤 : 차는 울산에 도착하였고 “울산을 떠나기 전에 꼭 한번 연락주세요?”라며 건네주는 연락처를 받으며 그들과 작별을 고했다. 울산 전역에 부는 바닷바람은 몹시도 차갑고 매서웠다. 우리는 일단 걸인들이 거처 할만 곳이 다리 밑과 야적장 주변일 것이라는 판단에 울산을 가로지르는 태화강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거지들이 겨울에는 다들 들어가고 없단다. 추운 날씨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는 그 많던 걸인들, 과연 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하루하루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일까?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그들 일 찐데? 하는 의구심으로 우리는 계속 발길이 닿는 대로 둘러보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들었을 때 우리 눈에는 야음성당이 들어 왔고 성당에 들어가 잠시 동안 성체조배를 하며 앞으로 우리가 필요 한 바 은혜를 주시도록 간구하였다. “저녁은 어디서 얻어먹을까?” “오늘 밤은 어디서 자야 하는가?”하는 첫 번째 걱정이 불현듯 다가 왔을 때 이것이 걸인들이 겪는 큰 고충 중의 하나임을 우리 또한 실재로 느꼈고 오늘 밤 뚜렷한 잠자리를 찾지 못하는 만약의 경우 야음성당 성체 조배 실에서 기도하며 밤을   지새기로 작정을 하고 다시 기약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었다.


*밤 9時 : 울산시가 이곳저곳을 걷다가 내일 새벽 이곳을 떠나기 전에 우리의 여정을 걱정해 준 이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여 전화를 드렸을 때, 은총의 집이 근처에 있음을 알았다. 우리가 아직 잠자리를 찾아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기에 불우한 소년, 소년 가장들이 모여 산다는 그곳을 방문하기로 했다.


   ‘은총의 집’ : 초라하기 그지없는 겉모습과는 달리 하느님의 사랑으로 뭉쳐진 작은 공동체였다. 몇 해 전 자매님이 본당 활동을 하던 중에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 한 소년을 만나 그와 인연을 맺게 된 이후 여러 교우들의 인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소년, 소녀 가장들이 그들의 동생들과 함께 자매님을 찾아와 자신들의 어머니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게 되어 지금 현재 30여명의 식구가 되었다 한다.


   마침 우리가 그곳을 갔을 때 꽃동네에서 봉사를 마치고 귀가한 그들은 남아있던 이들과 꽃동네에서의 경험들을 이야기하며 마냥 즐거워하던 차에 우리의 방문은 더 한층 분위기를 고조시키기에 충분했고 집안은 온통 꽃동네 바람이 불어 내일이라도 또 가자고 칭얼거리는 아이도 있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그들의 생활이었지만 어느 한구석 어두운 기색 없이 웃고 떠들고 모여 앉아 묵묵히기도를 바치는 그 모습은 정녕 이들은 사랑 받는 주님의 백성들임을 알 수 있었다.


*밤 10時 : 자매님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거절할 수 없어서 첫날밤은 은총의 집에서 지새기로 하였다. 그 대신에 잠자리만큼은 천막으로 지은 가건물에서 찬 겨울의 첫 밤을 맞이하며 기도와 묵상 그리고 하루의 반성을 하고 자정을 넘기면서 선잠을 청했다.


둘째 날


*새벽 6時 : 자명종 소리에 잠을 깨어나 희미한 촛불아래서 아침 성무일도를 바치고 아직 모두들 곤히 잠들어 있는 은총의 집을 나와 새벽의 찬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며 울산 시내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성원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와야 했지만 이해하리라 믿었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주님을 기꺼운 마음으로 모시고 아름답게 살고 있는 ‘은총의 집’식구들을 알게 됨은 여간한 기쁨이 아니 였으며, 아무쪼록 그들 소년, 소녀 가장들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그들의 모든 나날을 하느님께 부탁드리는 기도를 드렸다.


   우리는 다시 걸인들이 이 추위를 피해 기거하고 있을 만한 곳을 찾아 헤매다아침식사를 어떻게 어디서 해결할 것인가를 기도 중에 성모님의 안배하심을 기다렸다. 구걸하기에는 아직 우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또 아직은 이 정도의 배고픔은 견디어 낼 수 있다하며 자만하였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고, 뱃속에서는 이상한 요동이 치기 시작하였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내 성당 가까이 불쌍한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가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을 때, 우리의 발걸음은 그곳에서 우리가 찾는 불우한 분이 계실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우리의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곧장 무료급식소를 찾아 빠른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아침 11時 : 이 골목 저 골목에서 허름한 차림의 노인들과 걸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두 눈을 더 크게 뜨며 한 분 한 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줄을 서서 무료급식을 받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의아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성급히 끼니를 때우고 밖으로 나와 몇 분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차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식들이 있었고, 집을 가까이에 두고 있었다. “왜 여기서 식사를 하느냐”는 우리의 물음에 대해 그분들은 “집에서 며느리들의 눈치를 보느니 노인정이나 시장통에 나와 놀다가 점심식사 시간이 되어 이곳에 와서 100원을 내고 식사를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고 말문을 흐렸다.


  그러나 그분들의 말에는 자신감이 없었고, 실제 우리 눈에 비쳐진 그들의 허름한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노인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도 남음이 있었다.


*12時(정오) : 40대 중반의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절뚝거리면서 식사를 하고 어디론가 가는 전형적인 걸인을 발견하고 그분의 뒤를 쫓아 우리도 함께 걸었다. 시내 상가를 거닐며 가가호호 문을 열고 들어가 방문을 하는 그분은 돈을 구걸하기 시작하였는데, 때론 밝은 얼굴로 때론 어둡고 침통한 얼굴로 상가를 나오시는 모습에서 구걸의 정도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를 1시간 정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성거리고 있을 때, 그분의 곁으로 다가가 인사하였고, 양지 바른 곳에 앉아서 꽃동네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자신의 고향은 경북 안동 울산에는 돈 벌이를 하러 왔으며, 7년 전 다리를 다쳐 직장을 그만둔 이후 걸인 생활을 시작하였고, 가족 관계로는 부인과 슬하에 2명의 딸이 있는데 부인은 몇 해 전 교통사고로 사망, 딸들은 안동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으나 정작 자신은 무능력자로 친척들이 받아주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걸인 생활로 연명해가고 있다고 했다.


   처음 우리들의 제안에 대하여 의아해 했지만 오랜 시간 우리의 설득에 대하여 입소하실 것을 응낙하셨고 곧 꽃동네로 연락을 하여 그분을 모시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구했다.


*오후 3時 30分 : 지난밤부터 허리의 심한 통증을 견디기 어려웠던 동료 수사는 부득이하게 걸인을 모시고 울산發 청주行 버스를 타고 귀가 길에 올랐다. 비록 수련장 수사님의 승낙을 받고 여비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애당초 규칙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까닭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이제 혼자서 나머지 남은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잖게 마음을 짓눌렀지만 모든 것을 성모님께 의탁 드리기로 다시  한번 마음먹었다.


*오후 4時 : 잠시 한 숨을 돌리며 마음을 가다듬고 목적지를 경주로 정했다. 가는 도중에 무임승차를 하든지 아니면 걸으면서 걸인들이 있을 만한 곳을 두루 살펴 볼 작정으로 다시 걸음을 재촉하였다. 경주 - 포항 간 산업도로, 무섭게 질주하는 대형 차량의 행렬은 끝없이 계속되었고 차량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이는 바람은 더욱 차가워 느껴지는 체감기온은 살갗을 얼얼하게 만들기 시작하였다.


   묵주를 꺼내 들고 여러 시간을 걸으며 가끔씩 손을 들어 무임승차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 그 거절의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나 자신의 초라함이란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춥고 배고픈, 그야말로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밤 10時 : 24Km를 6時間 정도 걷다가 추위와 배고픔에 못 이겨 지친 몸을 누인 곳은 울산 - 경주간의 중간지점인 ‘외동’이라는 곳 황량한 들판 어느 볏단이었다. 볏단 속을 파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어가 반쯤 앉아 잠을 청하려 했지만 볏단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온 몸은 더욱 떨려왔다. 하지만 찬 서리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비록 초라한 잠자리였지만 만족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가끔씩 뒤척이다가 선잠에서 깨어나 볏단을 열어젖히고 밤하늘의 달과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이 우주 안에 벌어지는 모든 인간사와 나의 현주소, 그리고 이 모든 삼라만상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묵상했고, 다시 애써 잠을 청하려 했지만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셋째 날


*새벽 3時 30分 : 영하의 기온, 몸서리치는 추위에 못 이겨 선잠에서 깨어나 불을 피울까 생각했지만 바람이 심하게 몰아쳐 감히 피울 수가 없었다. 혹시 지금 이 시간 길거리에서 다리 밑에서 나처럼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을 지도 모르는 그 어떤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얼어붙은 나의 몸을 녹이기 위해 다시 걸음을 재촉하였다.


*아침 9時 : 다시 6時間 정도 새벽길을 걸어 경주에 도착하였다. 오랜 시간을 걸은 탓으로 발목도 부어올라 걸음도 불편하려니와 걷는 동안 흘린 땀이 이내 찬 기온에 식어버리기를 계속하면서 감기에 걸린 듯했다. 그리고 시내 중심가에 이미 들어 선 터라 어디서 아침을 구걸하여 먹는 다는 것조차 힘들었다.


   우선 몸을 녹이기 위해서 경주역을 찾았고, 그 곳에서 밤새 새우 잠을 잤을 지도 모르는 걸인들의 동정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국제 관광의 도시 경주’답게 내가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몇몇의 노인들이 담뱃값 정도를 구걸하는 정도였다.


*오전 11時 : 경주역을 나와 시외버스 터미널, 시장 뒷골목, 폐품 수집 장, 공사장, 다리 밑, 시내 상가 등을 두루 살펴보며 걷고 있었을 때, 나의 모습과 심정은 영락없는 걸인이었다. 배고픈 서러움과 불편한 걸음걸이 그리고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 앞에서 마주 오는 어떤 사람들은 나를 피해서 돌아 지나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택가로 들어가 구걸을 시도해 보았으나 서너 번 실패의 쓴맛을 보게 되었고, 때문에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경주 천 부근에 있는 초라한 무료급식소를 찾아 허기를 채우고 경주를 빠져나가는 국도를 향하여 다시 걸음을 재촉하였다.


*오후 5時 : 경주에서 3時쯤 포항行 화물차를 얻어 타고 포항 입구 하차하여 곧장 걸인들이 모여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시내와 터미널 그리고 역전주변을 돌아보았다. 드디어 포항역 대합실에서 만취된 상태 횡설수설하며 서로 시비를 거는 걸인 3분을 발견하였다. 그 중에 한 분은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 온 몸에서 악취가 풍기며 벤치에 누워 코를 골고 있었는데 겉모습으로 보아서는 꽃동네로 모셔야 할 분인 듯했다.


   그러나 막상 대화를 시도하려했지만 동료 걸인들의 불만을 토로하는 듯

하여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었다. 따로 좋은 기회를 보아 접근하기로 하고 역전을 빠져 나와 다른 곳을 향하였다. 나 자신이 배고픈 걸인인데 걸인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 사뭇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졌다.


*오후 8時 : 시가지 구석구석과 죽도(포구) 어시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는 사람들에게 포항시내의 걸인 실태를 여쭈어 보던 중 어떤 신자 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 또한 어려운 자신의 삶 가운데에서도 남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것에 관심이 많으셨던 분이었는데, 그 동안 여러 불우한 사람을 살아가도록 도와준 바 있고, 또 얼마 전부터 걸인 한 분을 재활을 시키며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간단한 요기(국밥)를 해결하고, 신자 분이 돕고 있는 재활걸인이 지내는 부둣가로 안내되어 그 재활걸인(일일 용역 꾼)을 만나게 해 주어 지난 걸인생활의 경험들을 들을 수 있었다. 또 초라한 자취방이었지만 고맙게도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어젯밤 황량한 ‘외동’ 들판 가운데 있는 볏 짚단 속에서의 을씨년스러운 잠자리에 비하면 가히 호텔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안배하심이라고 감사드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넷째 날


*아침 6時 : 아침기도와 오늘 복음을 잠시 묵상하고 새벽 어두운 거리로 나와 어제 저녁에 만취된 상태로 서로 시시비비를 가리던 걸인들을 만나기 위하여 곧장 포항역전으로 나갔다. 다행히도 내 눈에 가장 띄던 걸인만이 술이 깬 상태로 역전 밖으로 쫓겨나(악취가 심했으므로) 우두커니 앉아 계셨고, 술기운에 행패를 부리던 다른 두 명은 보이지 않아 그분과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그분은 58세이며, 젊으셨을 때 뱃사람으로 술을 좋아했고, 돈도 많이 벌었었는데 친척으로부터 사기를 당하여 무일푼이 되었으며, 나이가 들어 취직하기도 힘들고 하여 걸인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다. 부인은 사망하셨고, 이미 장성한 자식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마저도 외면 당신 몰래 모두 이사들을 하여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조차도 모르는 상태로 갈 곳 없이 전국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1000원을 꺼내주시며 소주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걸인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오전 11時 : 그분과 살아가는 이야기가 계속되었지만 ‘꽃동네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이실 지 몰라 망설이다가 시장 끼를 느끼시는 그분은 “먹을 것이 있으면 좀 달라”고 요구했지만 실로 나 또한 거지와 같은 형편이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무료 급식소’를 함께 가서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곳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밥을 배식하는 봉사자들의 집요한 질문에 그만 나의 신분을 밝히게 되었고, 이번 현장체험에 대한 열렬한 성원도 받았다. 그 동안 안氏 아저씨로부터 꽃동네를 함께 가시겠다는 확답은 얻을 수 있었다. 다시 안氏 아저씨와 함께 역전으로 돌아왔을 때, 공중전화 박스에서 한 분의 50대 중반의 아주머니 걸인이 얼굴에 짙은 병색으로 쓰러진 채 주무시고 계신 것을 발견하였다.


   그 아주머니와는 면담의 여지도 필요 없이 충분히 입소 대상이 될 듯 하여, 수련장 수사님께 보고를 드렸다. 꽃동네와 포항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두 분의 걸인을 모시고자 하는 만큼 포항시청에 문의를 하면 차량을 지원을 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문의를 하여 마침내 그곳에 가서 차량을 가지고 왔을 때, 그 동안 공중전화 박스에 쓰러져 있던 아주머니 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 동안 그 아주머니를 찾아 시장 통을 헤매   였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시청 공무원은 한 분만 모시고 그 먼 꽃동네까지 가기에는 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셨으며 나 또한 미안하여 되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안氏 아저씨를 역전에 계시도록 하고, 나는 계속해서 시장 통에서 보았다는 행상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아주머니를 찾아 어시장을 몇 바퀴고 돌아 다녔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장과 역전(안씨 아저씨의 근황을 살피기 위하여)을 여러 번 왕래하던 중 오전부터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 오시던 안氏 아저씨가 “꽃동네로 갈려면 빨리 가지 뭐 하는 거냐?”고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찾는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고, 찾은 사람은 빨리 가자고 재촉하고, 꽃동네에서 차를 가지고 내려오라고 하기에는 거리상으로나 시간상으로 너무나 멀고, 그렇다고 지금 수중에 갖고 있는 비상금도 없는 실로 마음만 바빴다.


*오후 6時20分 : 1時間 정도 숨 막히는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완행열차에 안氏 아저씨를 모시고 몸을 실었다. 안氏 아저씨의 재촉에 못 이겨서 그리고 추운 겨울밤 잠자리도 해결할 겸 야간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지만 안氏 아저씨의 몸에서 풍겨나는 악취에 사람들은 코를 잡으며 불만을 토로하였고, 이를 신고 받은 승무원 또한 대단히 역정을 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사실을 말씀드리고 겨우 사람들의 성화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기차는 종착역인 동대구를 향하여 어둠을 달리는 동안 피곤에 지친 안氏 아저씨는 심하게 코를 골며 잠이 드셨다. 그리고 난 오늘 하루의 체험들(비난, 열렬한 성원, 불량배들의 위협 등)과 무엇보다 무료급식소에 만난 덕수동 본당 신부님의 강복과 물질적 도움을 깊이 묵상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


*밤 10時 56分 : 동대구에서 열차를 갈아탔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안氏 아저씨의 시장 끼를 채워드리고 다시 조치원까지 표를 산 다음 역무원의 양해를 얻어 열차에 올랐다.


다섯째 날


*새벽 1時 25分 : 조치원역에 도착, 날을 새기로 하고 역구내로 들어갔을 때 난롯가 에는 20~30여명의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대합실로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안氏 아저씨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에 코를 잡고 자리를 비켜서며 저마다 한 마디씩 불평들을 했지만 아저씨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난롯가 벤치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런데 미쳐 따스함을 느끼기도 전에 어느새 역무원이 다가와 밖으로 내 쫓으려고 윽박을 지르는 것이었다. 이미 사람들로부터 갖은 욕설과 천대 그리고 내침 받는 것에 익숙해 있는 아저씨는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고 영하의 추운 역 밖으로 나가려는 것이었다. 나는 아저씨를 붙들어 세우고 역무원에게 이러이러한 사실을 말씀드리고 겨우 날이 샐 때까지만 대합실에 있기로 허락을 받아냈다.


*새벽 2時 : 조치원역 화장실에서 너무나도 기가 막힌 광경을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스팀에 등을 기대고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코를 골로 있는 두 분의 걸인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분들도 대합실에서 쫓겨나 화장실에 들어와 차갑게 식어버린 스팀이라도 위안 삼아 밤을 지새우려고 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말할 수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먼 포항에서 어렵게 안氏 아저씨를 모시고 밤차를 타게 된 것도, 조치원이라는 곳에 내려 날이 밝기를 기다리게 된 것도, 전혀 계획에도 없는 것이었는데,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심은 저분들도 꽃동네로 모시도록 하기 위하여 미리 준비된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니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 4時쯤 : 화장실에 주무시던 두 분의 아저씨 중에서 한 분이 잠에서 깨어나 추위를 피해 대합실로 들어오셨을 때 나는 반가움에 인사를, 그리고 따뜻한 자판기 커피를 대접하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아저씨는 54세로, 몇 년 전 동상으로 한쪽 발가락을 절단하게 되어 보행의 불편을 느끼며, 빈속에 깡 소주를 많이 마셔서 위장을 다 버렸고, “뭘 먹으면 토한다.”고 했다.


   수년간 정처 없는 구걸생활, 갱생원에서도 생활했으며, 그리고 꽃동네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다고 하셨다. 처음 나의 제안에 대해서 머뭇거리셨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따라 가시겠다고 결정을 하셨다.


   그리고 다시 화장실로 갔을 때 나머지 한 분도 어설픈 잠에서 깨어나 담배를 피우며 알아들을 수없는 말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분은 나의 제안에 대하여 처음에는 가고 싶어 하면서도 “그런 곳에 가면 사람을 때리지 않느냐?” 하시며 반신반의 하셨다. 일단 좀 더 시간을 두고 다시 제의해 보기로 하였다.


*아침 7時 : 이 시간이 되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먼저 수련장 수사님께 전화를 드려 조치원에 있음을 알려드리고, 주머니에 남은 몇 푼의 돈으로 두 분을 모시고 근처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대접해 드렸다. 그런데 식당 주인이라는 사람, “냄새가 나서 못 살겠다”는 투정과 함께 밥을 내오더니 “빨리 먹고 나가라”고 하는가 하면 “냄새를 빼야겠다.”며 현관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었다.


   내심 무엇이라고 한마디 내뱉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다시 대합실로 돌아와 차가 도착하는 동안 나머지 한 분에 대해서 설득을 시작하였으나 쉽지가 않았다. 두 분의 걸인은 언제 어떻게 꽃동네로 가게 되는지 영문도 모?체 “무작정 기다려 달라”는 나의 말에 신임을 할 수 없다는 듯이 재차 캐묻는가 하면 9時를 넘기면서 “어디로 가든지 갈려면 빨리 가자”하며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오전 10時 : 역전 광장으로 꽃동네 앰뷸런스가 들어오는 순간, 회한의 기쁨이 나는 물론 그 동안 오래 기다려온 걸인들도 기뻐하였다. 두 분의 아저씨는 곧장 차에 올랐으나 나머지 한 분은 아직도 반신반의하며 화장실에 계셔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제안해 보리라고 갔을 때, “술을 사주면 가겠다.”는 조건부를 내 걸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하자 곧 따라 나셨다.


*오후 4시쯤 : 세 분의 걸인들을 꽃동네로 보내고,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발길 닿는 대로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조치원 시가지를 헤집고 다니는 동안 문뜩 상가 대형 유리창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어느 정도 걸인의 행색을 갖춘 듯했다.


   이러한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이제는 별로 의식하지 않을 만큼 익숙해지기 시작하였고, 도리어 내심으로는 이번 ‘걸인체험’의 목적과 어느 정도 부합되어 가고 있다는 작은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천안行 시외버스에 올라타자마자 곧 단잠에 빠져들었다.


*밤 9時 : 5時 천안에 도착한 이후 줄 곧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걸인들이 있을 만한 곳을 두루 살피며 간간이 구걸을 시도해 보았지만 잘되질 않아 차라리 굶기로 작정을 하였다. 사실은 오늘 아침 아저씨들과 해장국을 먹은 탓으로 아직 시장 끼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천안역 대합실에서 잠시 쉬며 누군가를 열심히 찾고 있을 때, 사람들에 의해 대합실에서 역전광장으로 쫓기는 초라한 옷차림의 한 아저씨를 발견하였다.


   술에 만취된 그분은 곧 목구멍으로부터 온갖 것을 토해 내더니 결국은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나는 망설일 이유도 없었던 까닭에 곧 일으켜 세우고 토해낸 오물을 대충 닦아 냈다. 그분의 행색으로 보아 걸인은 아닌 듯했으며 일단 술이 깰 때를 기다리기로 마음먹고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때 마침 어느 60대 중반의 어른이 다가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달리 관심을 보여 왔다. 이렇게 된 정황을 말씀드리자 “오늘밤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 재워야겠다.”는 것이었다. 그 어른은 “이런 분들을 여러 명 자신의 집에 데려다가 재워 보낸 적이 있다”고 하며 “오늘도 이런 분을 만나기 위하여 역전을 나왔노라”고 말씀하시며 조금 전 만취 객을 보살피는 나의 행동을 지켜보았던지 “요즘 보기 힘든 젊은이구먼”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어른의 의향에 따라 택시를 타는 곳까지 만취된 분을 부축하여 데리고 가려 애쓰던 차에 만취되었던 사람은 조금 제 정신이 들어 근처가 집이라며 우리를 뿌리치고 쓰러질듯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지하도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 어른과 나는 ‘저대로 두었다가는 이 추위에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보고 일단 어디까지 가는지 뒤를 쫓아갔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대로 역전 부근에 자취를 하고 있었고, 노동 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이었다. 같이 갔던 어르신네는 자취방까지 들어가 다시 토해내는 오물을 닦아 드리고 잠자리까지 봐주는 열성을 보이셨다. 그리고 그 어르신과 나는 다시 역전으로 돌아 나오며 이웃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꽃동네’에 대해 말씀드리자 처음 듣는다며 “꽃동네를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약도를 적어드렸다.


*밤 11時이후 : “오늘 밤 잘 곳이 없으면 우리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가시오.”라고 말씀하시는 어르신네의 호의를 정중히 사양하고 혼자 남게 되자 갑자기 외로움이 찾아들었다. 조금 전 그 어르신네와 함께 만취 객을 간호하던 두어 시간은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천안역은 과연 교통의 요충지답게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자정이 가까워 가는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붐볐고, 그리고 그 틈바구니로 불량배들로 여럿이 몰려다니며 만만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 특히 내가 지켜보던 몇 몇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을 얕잡아 보며 술병을 깨뜨리는 등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심 화도 치밀었으나 한편으로는 선뜩 나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역전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저들을 두고 역전 바로 옆에 있는 파출소는 무엇을 하는지? 그 답답한 심정은 나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리라 생각하며 결국 역전을 나와 무작정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섯째 날


*새벽 3時쯤 : 자정을 넘기면서 불량배들로부터 안전을 위협받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천안역을 나와 묵주기도를 바치며 ‘병천’이라는 곳의 산길로 접어들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곳까지 오늘밤을 새울만한 곳이 여러 군데 있었지만 선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5박6일의 여정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여 그 동안의 체험들을 되돌아보며, 나름대로의 정리도 하고 지난날의 나의 자만자족했던 생활들을 반성하며, 좀 더 나의 육신의 피로를 통해서 진정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고통을 더욱 절실히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새벽 4시쯤 : 기왕 내 친 걸음, 꽃동네까지 가리라 마음먹고 지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승객을 태우고 새벽어둠을 가르며 달리던 택시가 내 앞을 가고 막고 서서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지만 태워 주겠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사양을 했지만 굳이 올라타라며 기사가 내려서 뒷문까지 열어 주는 성의를 보이는 것이었다.


   ‘이것도 주님의 뜻이려니’하고 택시를 탔고 그 덕분에 ‘진천’까지 단숨에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따스함도 잠시, 차에서 내려 다시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찬 서리가 내리는 듯 체감은 더욱 떨어져 으실 으실 온몸이 떨려왔다.


*새벽 5時쯤 : ‘진천 톨게이트’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인내의 한계’가 느껴왔다. 이대로 어디 한 곳에 주저앉았다가는 어쩌면 얼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밀려드는 졸음과 함께 나는 여전히 걷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신기한 것은 5-10분정도의 시간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렇게 몽롱한 상태로 걷고 있을 때 캄캄한 새벽길을 가속으로 달리는 차량들이 나를 향하여 질주할 때마다 나의 등을 두드리며 잠을 깨우는 여인의 목소리가 느껴졌다. (모든 여정을 마친 지금 다시 그때의 신비한 경험을 생각하면 그 여인은 분명히 성모님이셨다고 조심스럽게 확신된다. 사실 여정동안 늘 로사리오를 바치며 나의 모든 것을 성모님께 의탁 드렸었다.)


*아침 8時 : 이후 졸음에서 깨어나 온갖 힘을 다해 걸음을 옮겨 맹동입구에 이르렀을 때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5박6일의 현장체험을 무사히 마감했다.


느낀 점


   이번 체험을 통해 느낀 걸인들의 생활은 춥고 배고픈 곤고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특히 가슴 아팠던 것은 그들의 주된 생계의 현장인 공동장소(시장, 역전, 터미널 등)에서 추하고 냄새나는 걸인이기 때문에 받은 사람들의 냉대와 소외는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과 회복(재활)의 가능성 마져 꺾어버리는 사회악임에 분명했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그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적 사랑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생각되며,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꽃동네 공동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 꽃동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의 역할에 대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짐해 본다.


   지난 현장체험기간 동안 아쉬움이라면 여정 이튿날 동료 수사의 갑작스런 꽃동네로의 복귀(허리부상으로)는 남은 여정을 혼자서 계속하는데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걸인을 발견하고서 그분을 꽃동네로 모시기까지 많은 시간이 지체되어야 했고, 또 걸인을 위한 약간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걸인체험’과 ‘걸인을 꽃동네로 모시는 일’ 이 두 가지의 목적을 병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번 기간 동안 나는 실재적인 ‘걸인 체험’보다는 ‘걸인을 모시는 일’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4분의 걸인을 모신 지난 5박6일의 현장체험은 시작부터 마침까지 성모님을 통한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 늘 함께 한 시간이었음에 깊이 감사를 드리고 있다. 곤경과 위험 중에 적절히 필요한 것으로 채워주시고 인도해 주신 그 모든 은혜로 이번 현장체험은 고생스러움보다는 좋은 추억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Bossa Baroque - Dave Grusin



 물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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