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큰소리쳐 말씀하셨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23 조회수480 추천수4 반대(0) 신고

 

<큰소리쳐 말씀하셨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5-30)



  요한복음서에서 우리들이 흔히 간과하고 넘어가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큰소리치다(크라조,krazo)”입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마르코 복음서의 주제와 달리 비밀에 싸인 예수님이 아니라 명명백백히 드러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활동하시는 모습을 그리려고 했고, 언제나 “큰소리쳐(크라조) 말씀하셨다.”를 강조합니다.  얼버무리지 않고 당신의 과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모습입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요한 18,20-21)


  성전정화 사건도 다른 복음서와 달리 공생활 초기에 언급됩니다. 처음부터 조금도 굽힘없이 유대인들과 갈등하시는 분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심각하게 당신의 뜻이 위협받을 때에는 요르단 강 건너편이나 갈릴래아로 피신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7,1)


  오늘 복음에서도 유대인들과 메시아에 관해 논쟁하십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메시아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어디에서 온지도 모르게 홀연히 나타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언제 어디서 내려올지 다시 모르는 것처럼 비범하게 등장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피상적인 것에 머물렀으며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예수를 만나고, 그의 주장을 듣고, 그에게 투신하는 것을 방해만 하였습니다.

  그들의 메시아는 초월적 이미지를 지닌 존재였습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심판하고 엄한 징벌을 주시는 존재였습니다. 신비에 싸여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갈릴래아 출신이며, 비천한 목수의 아들이고, 형제와 친척들이 같은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죄인들과 어울렸으며, 가난한 이들과 여인들과도 가깝게 지냈습니다.

  물론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고 많은 기적을 베푸는 것을 보았고 그의 설교와 가르침이 가슴에 와 닿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이 너무 뜻밖인 내용인지라, 온전히 이해하기에 무엇인가 부족했고 전폭적인 신뢰심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한 나무꾼이 장에 나갔다가 새 도끼를 사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니 새 도끼라 그런지 나무가 잘 베어졌습니다. 굵은 나무도 수월하게 자를 수 있어 금세 지게에 가득 나무를 하였습니다. 평소보다 더 많은 나무를 지게에 매고 내려오면서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몇 칠 후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려 하니 도끼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온 집안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 이웃집 철수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러자 철수가 혹시 도끼를 훔쳐가지나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니 슬슬 눈길을 피하는 것이 영락없이 도둑질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확실한 것도 아니라 속으로 끙끙 매며 확증을 잡으려고 몇 날을 숨어 지켜보았습니다. 그러자 점점 철수의 행동이 이상하였습니다. 무엇인가 뒤가 켕기는 지 이리저리 살펴  봅니다. 철수가 밖으로 나간 뒤에 철수가  눈여겨 본 곳에 가서 확인을 하였으나 도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할 수 없이 빈손으로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던 중에 우연히 지난번에 나무했던 곳을 보다가 무엇인가 번쩍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혹시나 하여 달려 가 보니 바로 지난번에 산 도끼가 그대로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는 공연히 죄 없는 철수만 의심하였던 것이 미안해 졌습니다. 그리고 집에 내려와 보니 이제 철수는 더없이 밝게 노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의심은 쓸데없이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몰랐습니다. 공연한 의심만 했습니다. 우리도 혹시 유대인들이 지녔던 신관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표현된 하느님의 모습을 새롭게 확인해야 합니다. 절대 군주와 같은 모습, 현재를 희생하는 미래의 신, 恨이 낳은 신, 죄의식을 강요하는 신, 경건한 도덕가들의 우두머리인 신 등등 선입관에 매여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상에서 평범하게 그러나 특별하게 생활하신 예수의 모습은 하느님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해 강생하신 분”이라는 요한 저자의 고백을 새삼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