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대학생 딸아이가 이모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20 조회수494 추천수3 반대(0) 신고
      대학생 딸아이가 이모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1>

올해 대학 2학년이 된 딸아이가 지난해 일년 동안 경험했던 기숙사 생활을 접고 올해부터는 서울 상도동의 큰 이모 집에서 큰 이모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딸아이 일로 벌써 네 번이나 서울을 다녀왔다.

지난달 20일 아내와 함께 일차로 처형 집을 가서 딸아이가 쓸 방 정리를 하고 온 다음 26일에는 태안에서 새로 구입한 컴퓨터 책상과 칼라박스며, 컴퓨터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품들을 내 12인승 승합차에 가득 싣고 가서 짐 정리를 했다.

그런 일을 하면서 다시 한번 내 승합차에 감사했다. 내가 처음부터 승용차를 기피하고 20년 가까이 줄곧 승합차를 고수하는 데서 또 한번 보람을 얻은 셈이었다. 승합차 덕분에 두 형제 가족이 함께 '가족 나들이'도 많이 했고, 성당 신자들과 이웃들에게 종종 봉사도 해왔고, 특히 일주일에 한 번씩 70리 거리인 해미성지에 가서 좋은 물을 길어다가 여러 이웃들과 나누는 일을 10년 넘게 지속할 수 있고….

이래저래 승합차는 참으로 실용적인 차다. 내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육필로만 글을 쓰던 시절인 1990년대 초 몇 년 동안은 차 안에다 작은 책상을 하나 들여놓고 바닷가나 산 속 조용한 곳에 가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으며 하루 종일 글을 쓰곤 했다. 그렇게 해서 장편소설 <회색정글> (1992년 출간)을 쓰기도 했는데, 생각하면 그 시절이 참 그립다.

아무튼 승합차는 내게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좋은 일도 할 수 있게 해주고, 옛날엔 차 안에서 글도 많이 쓰게 해주었다. 그런 승합차는 상황에 따라서는 화물차도 될 수 있다. 딸아이의 여러 가지 생활 물품들을 승합차에 가득 싣고 서울을 가면서 승합차의 실용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실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으로 네비게이션에 감사했다. 나는 서울 지리를 워낙 몰라 그전에는 차를 가지고 서울 가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 내가 동작구 상도3동 000-000번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무난히 찾아갔다. 네비게이션에 상도동의 '000빌라'를 입력하고 '안내'를 부탁하니, 이 골목 저 골목을 돌고 돌아서 바로 집 앞에다가 내 차를 갖다 놓아주는 것이었다.

나는 네비게이션의 정확성에 감탄하면서 네비게이션 안에서 음성 안내를 맡아준 예쁜 목소리의 아가씨에게 감사했다. 네비게이션을 맨 처음 고안하고 개발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 궁금증을 가슴에 안았다. 그 사람에게 술 한잔 대접하고 심정을 아내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지난 9일 딸아이에게 추가 물품을 가져다 주는 일로 또 한번 서울을 갈 때는 노모께서 동행을 해주셨다. 또 한차례 꽃샘추위가 오리라는 기상청 예보 때문에 급작스럽게 결정한 일이었다. 몇 가지 소소한 물품과 함께 딸아이의 겨울옷을 두어 벌 싣고 가서 아무도 없는 집 안에 들여놓아 주고 곧바로 되돌아오는 일이었는데, 노모께서 굳이 동행을 하신 것은 손녀가 사는 집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지난 1일 방학을 마친 아들 녀석을 논산 D고에 데려다주는 '가족 나들이' 때 동행을 하셔서 손자가 생활하는 2학년 기숙사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셨던 어머니는 이번에는 손녀가 생활하는 집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게 되어서 흐뭇하신 표정이었다.

소소한 물품들이니 '택배'로 부쳐도 되건만 굳이 시간 쓰고 비용들이고 고생하는 내 처사를 내가 스스로 한탄하자 어머니는 "그게 다 세상 사는 재미 때문인 걸 워쩌겄어"라는 말로 나를 위로해주셨다. "맞어요. 이게 다 세상 사는 재미인 걸…" 나는 어머니 말씀에 동의하며 즐겁게 운전을 할 수 있었다.            

<2>

서울 상도3동 '000빌라'라는 이름의 4층 짜리 연립주택 맨 아래층은 반 지하로 되어 있다. 그 반 지하층의 집 하나가 내 처형의 집이다. 20평쯤 되는 것 같다. 넓지 않은 평수지만 방이 세 개나 되고 구조가 잘 되어 있어 단출한 식구가 살기에는 별로 불편함이 없을 것 같다.    

안방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방은 내 딸아이의 침실이다. 세 명도 잘 수 있는 넓은 침대가 있는데, 그 침대를 들어내지 않기로 하니 책상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 방은 침실로만 사용하기로 하고, 처형이 '옷방'으로 사용하던 방을 정리해서 딸아이의 공부방을 만들어 주었다. 결국 딸아이는 방 두 개를 쓰게 된 셈이다.

그 집은 내 처형이 30수년 전 결혼을 하고 신혼살림을 한 집이다. 두 아이를 낳아 기른 집이고, 어렵던 시절의 갖가지 고생이며 숱한 애환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집이다.


처형은 아들만 둘을 낳았는데, 큰아이를 열한 살 무렵에 잃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가 여름방학 때 공주 외가에 가서 금강 곰나루에서 수영을 하고 잠시 쉬던 중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중학생을 보게 되었다. 아무도 손을 쓰지 못하고 구경만 하자 이 아이가 뛰어들었다. 초등학생이 중3 학생을 구할 수도 없었고, 너무 지친 나머지 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큰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처형은 작은아들을 잘 기르며 가정의 오붓함을 지키고 싶어했지만, 남편의 잦은 외도 때문에 이중의 슬픔을 안고 살아야 했다.

올해 환갑인 처형보다는 한 살이 적으면서 나와는 동갑인 내 손위동서는 일찍이 봉제 사업에 뛰어들어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유명 의류업체와 손을 잡고, 메이커 상표가 붙는 고급 여성 의류를 만들어 납품하는 봉제 공장을 운영했다.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되니 그는 외도를 시작했다.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살림을 차리더니 또 다른 여자와도 살림을 차렸다. 그 사실이 앞의 여자에게 발각 나서 본처는 젖혀놓고 두 여자 사이에 싸움이 붙기도 했다.                  

사업을 일구느라 밤잠을 못 자며 함께 고생했던 처형은 남편의 행실을 보면서 경제적으로 자립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약간의 결점 때문에 유명 메이커의 상표를 붙이고 매장으로 나가지 못하는 물건들을 받아서 연줄을 이용하여 싸게 파는 장사를 했다. 이를테면 '야매'라고 부를 수 있는 장사였다.

세월과 함께 처형은 꽤 돈을 모았고, 마침내 자력으로 성산동의 아파트 한 채를 구입했다. 연립주택 반 지하층 집을 벗어나서 새 아파트에서 살게 된 기쁨이야 컸지만, 처형은 여전히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쓸쓸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처형이 성산동 아파트에서 살 때 두세 번 그 집을 가본 적이 있다. 두 번은 처가 6남매의 친목 모임 때문에 갔고, 한 번은 혼자 가서 하룻밤 신세를 졌는데, 그때마다 세상에 엄연히 살아 있는 손위동서의 '빈자리' 때문에 되우 씁쓸한 기분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그때는 나 혼자 가서 잘 때도 처형의 작은아들 덕에 하룻밤 신세 지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처형은 큰 실수를 했다. 딴살림을 하는 남편이 골프와 낚시 등으로 자유롭게 삶을 즐기느라 봉제 공장의 운영권을 동생에게 넘긴 이후 봉제 공장이 자금 압박을 받게 되자 시동생은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 형수에게 아파트의 근저당 설정을 부탁해왔고, 처형은 시동생의 그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내 보금자리를 매제에게 담보 제공했다가 그만 법원 경매 과정에서 간신히 되찾는 등 눈물겨운 상황을 겪는 내 사정을 잘 전해 들어 소상히 알면서도 처형이 왜 그처럼 쉽게 자기 보금자리를 시동생에게 담보 제공을 했는지 적이 의아스럽지만, 세상일이란 건 원래 알다가도 모를 요지경 속이 아니던가.

아무튼 그 실수로 처형은 애써 장만하여 10년도 살지 못한 집을 고스란히 잃고 말았다. 시동생이 긴급한 상황을 미리 알려주지 않은 탓에 근저당 설정 은행 계좌에 예치되어 있던 처형의 적지 않은 예금도 몽땅 차압을 당하고 말았다.

처형은 졸지에 알거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지만 다행히 전에 살던 상도동의 연립주택을 팔지 않고 전세를 놓았기 때문에, 성산동의 아파트를 내주고 원래 살았던 상도동의 연립주택으로 겨우 되돌아올 수 있었다.

  <3>

처형이 잘 나가던 시절에는 나도 처형 덕을 많이 보았다. 처형은 내게 용돈을 준 적도 있고, 1996년 내가 첫 해외 여행을 할 때는 미화 300달러를 주기도 했다. 또 처형은 우리 부부는 물론이고 내 아이들의 옷가지를 거의 대주다시피 했다. 나는 처형이 마련해준 옷들을 지금도 여러 벌이나 잘 간수하며 아껴 입는다. 그 옷들을 입을 때마다 그리운 지난 시절의 기억 속에서 고마움과 야릇한 연민이 교차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로 손이 큰 편인 처형은 특히 친정 부모들의 살림 비용을 거의 도맡아 대다시피 했다. 완전히 아들들의 몫을 대신 했다. 그리고 내 장인어른이 90년대 중반 공주시 신관동의 44평 새 아파트를 구입하실 때는 집 값의 반을 처형이 대드렸다.

그런데 처형이 '망한(처형의 표현)' 다음 장인어른이 홀로 되시고 나서 아파트를 비롯하여 모든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실 때 장인어른은 딸들과는 상의 한마디 하시지 않았다. 장인어른의 지혜롭지 못한 처사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모든 딸들과 상의는 하지 않으시더라도 큰딸과는 상의를 하셨어야 옳지 않을까 싶다.

처형은 그 사실에서도 슬픔이 컸던 듯싶다. 그 슬픔 탓에 모든 친정 붙이들과 만나는 것조차 기피를 해서, 한동안 우리 부부도 처형과 소원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끔 서울을 갈 때도 처형 집을 찾지 않았다. 훤한 아파트에서 살다가 졸지에 집을 잃고 원래의 반 지하 연립으로 돌아와 사시는 처형의 모습을 보는 것도 미안하고, 장성한 작은아들을 장가들여 따로 살게 하고 혼자 사시는 처형 집에 가서 하룻밤 신세를 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처형 집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서울에 갈 적마다 열차나 버스 시간에 맞춰 돌아오는 발걸음을 서두르곤 했다.

그러다가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접게 된 딸아이 덕분에 나도 이제부터는 마음놓고 처형 집에 가서 잘 수 있게 되었다. 내 딸아이 소식을 듣자마자 이내 조카딸과 함께 살기로 결심해주신 처형께 고마운 마음 한량없다.

지난 17일에도 우리 부부는 딸아이에게 전기 스탠드 등 몇 가지 소소한 물품을 갖다주는 일로 서울을 갔다. 그리고 그날 밤도 처형 집에서 잤다. 지난달 26일에 이어 두 번째로 처형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잠을 자면서,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내 딸아이가 남도 아닌 큰 이모 집에서 이모와 단 둘이 생활하며 편히 대학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 또 그 덕분에 내 서울 나들이도 편리를 얻게 되었으니 더욱….

(나는 장차 내 아들 녀석도 '신학교에 가지 않게 되면' 큰 이모 덕을 보게 될지 모르고, 내 조카 녀석들도 이 집 덕을 보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은근히 기대를 갖는다.)
  
처형은 지난 1월 공주 큰처남 댁이 세상을 뜬 후로는 일주일에 이틀 꼴로 공주 동생 집에 내려가서 혼자 된 큰처남의 살림을 도와주신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내 딸아이는 '반 자취'를 하는 셈이지만, 그것도 적이 다행스런 일이다. 처형이 다시금 친정 쪽에 관심과 시간을 할애하는 덕에 안양의 작은아들 집에서 사시는 장인어른도 공주 큰아들 집으로 옮겨 사실 의향이시라고 한다.

장인어른의 그런 의향이 빨리 실행되도록 모든 딸들이 바라고 있다. 모든 딸들이 한가지로 왜 그런 마음을 갖는지, 그 요지경 속 이유를 말할 필요는 없고….


2007-03-20 13:13
ⓒ 2007 OhmyNews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