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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 아버지의 집을 놔두고" --- 2007.3.18 사순 제4주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18 조회수472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수철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3.18 사순 제4주일

                            

여호5,9ㄱㄴ.10-12 2코린5,17-21 루카15,1-3.11ㄴ-32


                                                

 

 

 

"왜 아버지의 집을 놔두고"

 



하느님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이

어머니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식 때문에 크게 속이 상한

어느 어머니의 탄식이 생각납니다.


“음식은 상하면 버리기라도 하는 데

  자식은 버리지도 못하고..... 부모는 자식의 종입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습니다.”


자식 문제가 걸리면

아무한테도 말도 못하고

난감하고 착잡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다 합니다.

 

남편 속 썩이는

건 자식 속 썩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합니다.


마찬가지 똑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탄식을 듣는 듯합니다.


“음식은 상하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사람들은 버리지도 못하고....

  하느님은 사람들의 종입니다.

  사람들 이기는 하느님 없습니다.”


이런 표현들이 가리키는바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전능은 무능하다 싶을 정도로

무한한 인내의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의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자비로운 하느님이 환히 계시되고 있습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무능할 정도로 자비로운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받았을 내면의 상처는 얼마나 컸을까요?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아버지의 심정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다짜고짜 당돌하게 자기 몫을 챙겨 떠나는 작은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군말 없이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합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는 인간이기에,

인간의 자유를 무한히 존중하시는 하느님의 면모를 봅니다.


오늘 복음의 묘사들

너무나 생생하고 감동적이기에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복음의 중반부부터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이 절정을 이룹니다.

 

자비로운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기다려

자나 깨나 동네 어귀 아득한 길목을 바라봤음이 틀림없습니다.

 

아직도 멀리 떨어져

오고 있는 작은 아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순간,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즉시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합니다.

 

우리말 표현보다도

이 부분은 영어 표현이 더 실감이 납니다.


“He was filled with compassion,

  and ran to his son,

  embraced him and kissed him.”


직역하면,

아버지는 연민으로 가득차서 쏜살같이 아들에게 달려가

그를 얼싸안고 키스를 퍼부었다는 뜻입니다.

 

몸으로 확인하는 아버지의 사랑이요,

작은 아들의 메마른 가슴에

봄비처럼 쏟아지는 아버지의 자비입니다.

 

이런 자비에 감격한 작은 아들의 철저한 회개입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아들의 고백을 듣는 둥 마는 둥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빨리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는데,

잃었던 아들을 되찾았는데,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이보다 큰 하느님의 기쁨도 없습니다.

 

끝까지 참고 인내한 하느님 자비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자비로운 하느님께 아버지께 돌아온 작은 아들을 통해

완전히 고귀한 인간 품위를 되찾는 모습을 봅니다.


소견머리 좁은 큰 아들의 화풀이에도

자비로운 아버지는 큰 아들을 전혀 꾸짖거나 탓하지  않고

조용히 아들의 마음에 호소하십니다.


“예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여기서 끝납니다만,

아마 큰 아들도 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호소에 회개하여

기쁨의 환영 잔치에 참석했으리라 봅니다.


어제의 호세아 말씀이 생각납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고쳐주시고, 싸매주시고, 살려주시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이어 주님의 호소 말씀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아는 공부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알아가는 공부, 평생 과정입니다.

 

자녀들이나 남편 문제로 속이 상할 때

오늘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을 묵상하면

많은 위로와 힘을 얻을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던 중 불쑥 튀어나온 말입니다.


“하느님의 부잣집 자식들이 거지처럼 살아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사람들이

평생을 하느님을 잊고 그 고귀한 신분을 망각한 채

거지처럼, 야수처럼, 심지어는 악마처럼

막 살아가는 이들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네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 묵상했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완전히 막 살아가는 이들,

하느님을 생각하고 방종의 생활을 하다가

하느님께 서서히 방향을 돌린 작은 아들 같은 이들,

큰 아들처럼 아버지 곁에서 내면이야 어떻든

종처럼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아버지 곁에 돌아와

아버지의 자비를 온몸과 마음으로 깨닫고 살아가는

회개한 작은 아들 같은 이들입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할까요?


완전 냉담으로 하느님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작은 아들들은 얼마나 많을까요?


냉담을 풀고 아버지께 돌아오고 있는

작은 아들들은 얼마나 될까요?


겉으로야 아버지 곁에서

나무랄 데 없는 신자생활이요 수도생활이지만

마음은 아버지께 멀리 있는 큰아들 같은 삶은 아닌지요?

아버지 곁에 함께 살아도

큰 아들 마음의 거리는 얼마나 멀었던가요? 

 
하느님 관계든, 사람 관계든,

거리는 가까워도 마음은 한 없이 멀 수도 있는 것입니다.

 

타향살이에 곤궁 중에 제정신이 들어

자비로운 아버지를 깨달아 귀향길에 오른 작은 아들,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마음은 이미 아버지와 일치되어 있었습니다.


네 부류의 사람들, 절대 고정적이 아닙니다.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믿음이, 희망이 식으면 큰

 아들처럼 될 수도 있고,

집 떠나 완전히 냉담한 작은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받은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부잣집 자녀들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께 돌아올 때 누구나

하느님 부잣집 자녀들로 품위 있고 아름답게 살 수 있고

이게 우리 인생의 전부입니다.

 

왜 아버지 집을 놔두고

세상 광야에서 탐욕의 종이 되어 방황합니까?


1독서 여호수아의 말씀처럼,

이미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하느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요,

2독서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우리들입니다.


“형제 여러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환경을 바꿔서,

사람을 바꿔서,

일을 바꿔서 새 사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자비로운 아버지 곁에서,

그리스도 안에 살 때 새사람입니다.

 

이 은혜로운 미사시간,

회개하여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찾아 온

작은 아들들인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생명의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당신의 말씀과 성체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충전시켜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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