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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18일 야곱의 우물-루카 15, 1- . 11-32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18 조회수547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 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1-­3.11-­32)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가진 돈을 다 달라고 하면서 “이제부터 내가 엄마 할게” 하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계속 내 뒤를 쫓아다니시며 이것저것 사 달라고 졸랐습니다. 저는 그만 귀찮아서 주머니에 있는 돈을 도로 꺼내주며 이제 엄마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작은아들을 보며 그때를 기억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뽑으라면 아마도 이 비유가 선택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아시는 하느님의 모습이구나, 바로 그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애쓰고 계시는구나’ 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해 봅니다.

작은아들:아, 정말 지겹다. 나도 머리가 굵을 만큼 굵었는데 평생 이렇게 아버지 밑에서 고리타분하게 농사나 짓고 살아야 하나. 더 넓은 세상에 나가 많은 걸 경험하며 내 힘으로 살고 싶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돈, 돈이 있어야 한단 말이야. 아버지께는 좀 죄송하지만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자. 그런데 형님이 뭐라고 하실까? 하기야 어차피 내 몫을 내 맘대로 쓰는 건데, 뭐. 잘 되면 될 것 아닌가? 와아!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순순히 내 몫을 정리해 주시지? 아무튼 이 그늘을 벗어나려면 가능한 한 멀리 떠나자. 마음이 변하시기 전에 빨리.

 

사람들이 나를 보면 뭐라고 할까? 부정한 짐승이라 먹지도 않는 돼지, 더구나 돼지 먹이인 이 열매를 먹는 꼴을. 그러나 이것이라도 배불리만 먹을 수 있다면 좋겠다. 종들도 마음껏 먹는 아버지 집의 따뜻한 식탁이 너무도 그립다.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어찌 이 꼴이 되었지? 생각하니 그 많던 재산이 제대로 쓰인 데가 없군. 많던 친구들도 돈과 함께 날아가 버렸으니.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이야. 선하신 아버지 그늘을 벗어나려고 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어.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어.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처럼 이렇게 죽을 지경이 되어야 제정신이 드니, 아버지 집이라면 종이라도 좋은 것을…. 아버지는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시는’(시편 103,10) 주님처럼 용서해 주실 거야. 잘못에 절망하여 생을 포기하지 말고 아버지께 가서 용서를 청해보자. 용기를 내보자. 그래,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자!

큰아들:아버지, 너무 무력하십니다.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라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십니까? 저 녀석의 기질을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늘 빠져 나갈 궁리만 하고 집에서 어디 제대로 마음먹고 일한 적이 있습니까? 저 재산으로 무엇을 하리라는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왜 한번도 설득해 보거나 따끔하게 꾸중해 보지도 않고 고스란히 다 넘겨주십니까? 힘에 부친다면 저도 있고 종들도 있지 않습니까! 참 답답하십니다. 남 보기에 창피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떤 소문이 들려올지 뻔한데, 이제 더 이상 저 녀석과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니, 아버지께서 이러실 수가? 내가 뭐라고 했던가. 돈을 어디다 썼는지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 집에 들어오게 하시다니. 더구나 옷과 가락지에다 잔치까지. 이젠 내 유산마저 넘볼지 모르는 저 녀석의 소행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기가 막혀서.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 말이라면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내게는 염소 한 마리 잡아주지 않으시더니 도대체 나는 뭔가? 나는 뭔가? 아버지는 나와 한번도 맞아본 적이 없어. 오후 늦게 온 일꾼들에게 제일 먼저 임금을 지불하지 않나. 그것도 아침 일찍 온 사람들과 똑같은 일당을 지불하는 그런 아버지. 아, 정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 섭섭할 뿐입니다. 아버지, 제 몫도 주십시오. 제가 나가겠습니다.

 

아버지:아들아, 사랑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니! 하느님께서 인간이 자유로운 결정으로 선택하고 살 수 있도록 존중해 주신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나는 내 아들을 안다. 붙들어 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지. 어떻게 될지 알면서 그 아이를 떠나보내는 것은 큰 아픔이었다. 어떤 경우에라도 제발 몸만 성하게 살아준다면 하는 것이 내 기도였지. 그래서 나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살아서 돌아왔구나. 한번도 돈의 행방에 대해 추궁하지도 않고, 앞으로의 다짐도 받지 않는 내가 무능하고 무력한 줄을 나도 안다. 네가 그렇게 되었어도 나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게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니 마음을 풀고 동생을 받아들이지 않을래? 아들아, 내 마음을 알아다오.

 

 

나:회개란 우리 마음이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향하는 것이라 하는데,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를 모르는 아들, 정말 비극이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잔치라는 것을 그가 어떻게 깨달을까? 회개하기 어려운 조건이지.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가 큰아들이구나. 세리들과 죄인들에 해당하는 작은아들처럼 차라리 잘못을 저지르고 아버지를 아는 것이 더 낫겠군. 아버지를 알게 해준 그 죄, 그래서 부활 찬송은 ‘오, 복된 죄여’라고 하지. 그렇다고 일부러 죄를 지어야 할까? 그건 분명 아니지만, 아직도 나는 큰아들로 살고 있는 것 같아 두렵고, 아버지의 참모습을 알게 된 작은아들이 부러울 따름이야. 무엇보다도 내 생각을 뒤엎는 사실은 아버지의 무력함이 작은아들을 돌아오게 한 것이지!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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