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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음에서 생명으로 - 3월 18일 묵상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17 조회수529 추천수4 반대(0) 신고

 

<두 아들과 아버지의 비유; 죽음에서 생명으로>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1-3. 11-32)


  

  흔히 탕자의 비유로 불리는 이 대목처럼 유명한 비유도 드뭅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 대목을 소재로 하여 글도 쓰고 음악과 미술품을 창작하였습니다. 모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비유로 우리에게 언제나 깊은 위로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비유 대목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묵상을 하게 됩니다. 용서, 구원, 기다림과 찾음, 올바른 재물의 사용, 잘못된 처신, 시기와 질투, 죽음과 생명, 떠남과 귀환, 재물에 대한 욕심, 무례와 사랑 등등 수 없이 많은 주제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웃에 사는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번듯한 직업도 있었고 자상한 부인과 학교에 다니는 자녀도 있으며, 재산도 넉넉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우울증이라는 병 때문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뒤에 들은 사실이지만 한동안 번창하며 개업하던 자리에 건물주인의 사위가 들어온다 하여 쫓겨나듯이 사업장을 이사한 것이 발단이 되었답니다. 성격이 착하고 소극적이었던 그는 제대로 항의조차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옛날만큼 환자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자신의 소극적인 성격을 비관하다가 점차로 우울증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런 사실을 눈치 챈 의사친구가 정신과 진료를 받아 볼 것을 권하였지만, 자기도 의사라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치료에 나서지 못했다고 합니다. 시간만 질질 끌고 말았답니다. 또 그 친구는 그를 위로 하였지만 비난과 핀잔을 주로 하였답니다. 그래야 정신을 차릴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 의사친구도 좀 더 따뜻하게 위로하지 못한 것에 뒤늦은 후회를 한다하더군요.


  정신과 전문의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우울증은 하나의 질병이며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치료에 나서야 한다고 합니다. 흔히들 제 생각만 조금 바꾸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철이 없나하고 오해하지만 그렇게 쉽지 않다고 합니다.


  환자들은 대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병이 악화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심각한 처지를 알아달라는 사인을 계속 보낸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이 볼 때 별것 아닌 것일지라도 그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것이므로 그들의 말과 사인을 무조건 들어주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심하게 보호 관찰해야 한다고 합니다.


  많은 환자들이 죽고 싶다는 표현을 직접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때  지나가는 말로 듣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명의 존귀함과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따뜻한 위로와 용서를 경험한 적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스스로 쓸모없다고 자책한답니다. 가족과 생활에 대한 의무감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공연히 격려한답시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호소해야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그보다는 가족들과 사회에서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고, 과거에 행복했던 기억을 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둘째 아들이 가족의 품에서 도망치려합니다. 무엇인가 새로움을 구하려고 탈출합니다. 여태껏 맺어왔던 관계를 단절하려고 합니다. 그리고선 인생을 허비합니다. 처음에 그는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어도 도움을 가족들에게 청하기보다 스스로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오기보다 이방지역에서 계속 머무르게 되고, 끝에 가서는 부정한 동물인 돼지로 상징되는 죄의 극한을 체험합니다. 다행히 그는 아버지와 하느님을 배반한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래도 아버지와 지내며 행복했던 시절을 기억해냅니다.


  크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그는 종으로라도 아버지 곁으로 가 지내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돌아옵니다.

  그는 아무런 질책 없이 받아들여주시는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을 체험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아들도 마음으로는 아버지께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죽어야만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으므로 결국 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린 꼴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처사에 화가 난 나머지 29절에서 자기 아버지에게 ‘보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동생더러는 ‘저 아들’이라고 제 3자 부르듯 함부로 대합니다. 큰 아들도 지금 가족과 관계를 단절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런 버릇없는 큰 아들에게도 야단치지 않으시고 용서합니다. 관계를 이어줍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자살은 관계를 단절하는 행동입니다. 남은 그 가족과 친지는 말할 수 없이 깊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극단적인 행동은 어쩌면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데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들에게 항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죄를 짓더라도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주십니다. 그 누구와도 관계를 단절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이처럼 가족과 이웃에게 언제나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관계를 단절하고 ‘모르는 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웃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일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 바로 조건 없는 용서일 것입니다.




    
    
      황홀한 고백 /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 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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