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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수씨의 1주기를 지내면서… 사랑을 나누며 어려움을 이겨나갑니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09 조회수633 추천수6 반대(0) 신고

   서른 아홉에 뇌출혈로 세상 뜬 제수씨 
      제수씨의 1주기를 지내면서… 사랑을 나누며 어려움을 이겨나갑니다 
      

  



▲ 엄마 제사상에 향불을 피우는 어린 남매  
ⓒ 지요하

지난해 12월 20일 하늘나라로 간 내 가운데 제수씨 강은실 요안나의 1주기를 지냈습니다. 뇌혈관 기형에 의한 뇌출혈로 서른 아홉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제수씨를 생각하며 우리 가족은 19·20일 이틀 동안 제사도 지내고 성묘도 하고 위령 미사도 봉헌했습니다.

제사는 음력으로 지내는 것이 상례이지만 우리는 일찍부터 해를 넘기지 않고 양력으로 지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제사를 음력으로 지내면 내년 1월 겨울방학 안에 위치하게 되어 아내가 제사 준비하는 일이 좀더 수월하겠지만, 그러면 아버님의 기일과 가까이 위치하게 되는 문제도 있고 해서 그냥 양력으로 지내기로 한 것이지요.

천주교 신자 가정으로서 성당에서 연미사를 지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꽃다발 들고 묘소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가족 사이에 논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성당에서 연미사를 지내니 집에서 제사는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당신 사후에는 절대로 제사 지내지 말고 성당에서 연미사만 지내고, 아버지 제사도 폐지하라는 말씀까지 하시고…). 연로한 처지에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며느리의 제사를 준비하고 지낸다는 것이 너무도 마음 아프신 까닭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그런 심정을 잘 헤아리면서도 아내는 제사를 지내고 싶어했습니다. 내년부터는 지내지 않더라도 올해는 1주기이니 제사를 지내자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한번쯤은 엄마 제사에 대한 기억을 갖게 해주는 것이 좋을 거라는 말도 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도 아내의 뜻에 동조를 했고, 동생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습니다. 동생은 어머니와 형수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뿐인 것 같았습니다. 명확하게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사를 지내고픈 마음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일단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한 다음에는 제수씨가 생전에 살았던 샘골연립에서 지내는 방안도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살림을 하지 않은지가 벌써 1년이나 된 집에 가서 음식을 차린다는 것부터 용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리미리 게장도 담그고 식혜도 만들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그냥 당일에 차리는 음식만으로 제사를 지내니, 제수씨 친정에는 제사를 알리기만 하고 초청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촌형님들께도 알리지 않고, 그냥 우리 가족끼리 단출하게 제사를 지내기로 했습니다.

당일 오전에 어머니께서 시장 보시는 일을 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전화를 기다렸다가 차를 갖고 가서 어머니를 모셔오는 일만 했습니다. 물건들을 집안으로 들여놓으면서 어머니는 "죽을 날이 코앞인 늙은 시에미가 젊은 나이에 죽은 며느리 제사지내자고 시장 보는 일을 다허구…. 개도 안 물어갈 팔자여. 그냥 징징 울고 다녔어" 또 눈물지으며 푸념을 하시더군요.

어머니와 아내는 제수씨를 위해 제사상을 차렸습니다

아내는 오후 일찍 조퇴를 했습니다. 3시쯤부터 줄곧 이것저것 제사 음식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시집오기 전에 개신교 신자 생활을 오래 해서 제사를 부정시하는 관념이 있을 법한데도 아내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정성을 다해 제사 음식 장만하는 아내를 보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건설 현장 작업장에서 돌아온 동생과 가족 모두의 배고픈 사정을 생각하여 9시 30분쯤 제사를 지냈습니다. 촛불을 켜고, 국악으로 성호경을 하고 기도를 한 다음 전통적인 제례 방식대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세상 떠난 영혼을 위한 기도와 함께 우리의 고유문화, 미풍양속을 우리 집에서도 이어가는 것은 여믓 다행한 일일 터였습니다.

그리고 기일 하루 전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기일 하루 전, 그러니까 고인이 살아 있을 시간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 음식 공양을 하듯 제사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고인의 생전 모습을 더욱 반추케 하는 일일 듯싶고….

고인에게 드렸던 음식을 놓고 온 가족이 음복(식사)을 하는 것은 또 얼마나 의미 깊은 일인지…. 비록 어머니와 아내가 눈물을 지었지만, 음복을 하면서 고인 생전에 우리 가족이 자주 외식을 했던 풍경도 함께 떠올리며 이런저런 얘기도 하게 되고….

제수씨의 기일인 20일 오후에는 제수씨의 묘소를 찾았습니다. 성묘에는 어머니와 나, 두 사람만 함께 했습니다. 공휴일이 아니니 가족 모두 성묘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오전에 성묘를 했을 테지만 내가 새벽 4시에 출타를 했다가 점심때 돌아온 사정으로 오후에 성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수씨의 묘 앞에 꽃다발을 놓고, 어머니와 나는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다음 어머니는 눈물을 지으면서도, 다음에 올 때는 꽃 단지를 하나 구해 오자고 하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죽은 사람의 묘이니, 묘 앞에 꽃 단지의 밑동을 묻고, 거기에 조화라도 꽂아서 항시 꽃이 피어 있는 형국을 만들어주자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내년 설 안에 어머니의 그 뜻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기일 저녁에는 성당에 가서 연미사를 지냈습니다. 마침 평일미사를 저녁에 지내는 수요일이었습니다. 성당에 가족 모두 가지는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일터에서 7시 넘어 돌아오는 동생에게 저녁을 차려주시는 일로 성당에 갈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큰아이인 규왕(중1)이가 학원 수업을 한 시간만 하고 일찍 돌아와서 우리 부부는 조카아이 둘을 모두 데리고 성당에 갈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연미사 지향을 알리면서 강은실 요안나의 이름을 두 번 불렀습니다. 강은실 요안나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사람이 우리 가족 외로 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느 영혼을 위해 위령미사를 지내면서 사제가 그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수씨가 세상을 떠난 후 일년이 지나는 동안 여러 번 위령미사를 지냈지만 한 미사에서 제수씨의 이름이 두 번 불린 일은 정말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미사를 지내면서 제수씨의 기일을 잊지 않고 연미사를 봉헌해주는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사랑의 십자가를 메고 갑니다

미사 후 소성당 밖으로 나오니 제수씨 또래의 자매들 중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2년 전에 당진으로 이사를 간 자매였습니다. 요안나의 기일을 맞아 태안 성당에서 연미사를 지내려고 일부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매와 함께, 제수씨 생전에 자주 어울리며 신앙생활을 재미있게 했던 제수씨 또래의 자매들이 여러 명이나 모여 있었습니다. 대개는 평일미사에는 자주 나오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강 요안나의 기일을 맞아 모두 저녁미사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내 제수씨 강은실 요안나의 영혼을 위해 알게 모르게 미사를 봉헌해 주신 분들, 엄마 잃은 두 아이에게 이렇게 저렇게 신경을 써주신 분들, 그 모든 분들께 이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고마운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수씨 떠난 후 우리 가족에게는 '사랑의 십자가'가 생겼습니다. 그 십자가를 가족 모두 함께 떠메고 열심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집은 저녁상을 대개 세 번 차립니다. 나는 매일같이 평일미사 참례를 중심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성당에 가기 위해 먼저 저녁을 먹습니다. 다음에는 일터에서 돌아온 동생이 저녁을 먹고, 마지막으로 학원에서 돌아온 조카녀석이 저녁을 먹습니다.

저녁미사 후에 레지오 모임과 성가 연습이 있는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두 번 저녁상 차리는 일을 맡아 해주십니다. 동생은 퇴근하면 형 집에 와서 아이들을 보고 저녁을 먹고, 다음날 아침에 먹을 밥 바구니를 가지고 자기 집으로 갑니다. 아침은 혼자 사는 집에서 혼자 먹고, 점심은 회사에서 해결합니다.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에 갈 부담이 없는 주말에는 아빠 집에 가서 잡니다. 아이들은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가운데서 마음껏 인터넷 게임을 하고 텔레비전을 볼 욕심 때문에 주말에 아빠 집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만(그래도 엄마의 체취가 남아 있는 집이기 때문에 더 좋아하겠지만…), 동생은 일주일 간격으로 하루나 이틀씩 제 살붙이들과 함께 자는 것이 무척 좋은 듯싶습니다.

동생은 지금도 밥을 먹으면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때가 있고, 가족 모두 힘들고 어렵습니다. 어머니는 저녁 늦게까지 두 번씩 저녁상을 차리는 노고보다도, 그 일 때문에 저녁미사에 가지 못하는 것을 더 아쉬워하십니다. 전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평일미사 참례를 거르지 않으셨던 분인데….

철부지 두 녀석을 맡아 기르는 일에는 신경도 많이 쓰이고 속상한 일들도 있고, 여러 가지로 어렵습니다. 어머니도 어렵고, 아내도 어렵고, 나도 어렵고, 동생도 어렵습니다. 철부지 아이들도 알게 모르게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하느님 신앙 안에서 '사랑의 십자가'로 생각하며 잘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가족 모두 나누어 메고, 함께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신부님이 어느 날 미사 강론 중에 하신 "그리스도 신자라면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팔자 타령이나 신세 한탄을 하지 말고, 그것을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십자가로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은 그리스도 신자일 수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늘 명심하면서….  


  2006-12-22 11:10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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