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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08 조회수673 추천수2 반대(0) 신고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마르 1,21-28)
 

 그들은 가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 보았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치심을 듣고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하나는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라는 반응과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강하게 거부하는 반응이다.

 

이 사람을 복음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회당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더러운 영이 들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워하는 깨끗한 영혼인가? 아니면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강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가? 아니면 놀라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인가?

 

왜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가? 사람의 말을 들었다면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보라. 예수님이 가르침을 시작하시기 이전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모두들 똑같이 회당에 있었다. 누가 건강한 영혼인지 누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이런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빛을 받고 평소의 삶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해서 평소에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법이다. 또 건강한 영혼이라고 해서 평소에 눈에 띄게 드러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아니다. 평소에는 잘 모른다.

 

각자 자기의 삶을 살기 때문이고 그리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속 마음을 우리네 눈으로는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말씀 앞에서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라고 말씀하신 대로 마음 속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겉으로 볼 때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몰랐다. 다만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말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평소에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대로 살면 자기가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서 사는 사람이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금방 화를 내고 거부하고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의견만이 최고인양 조금도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복음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는 사람은 바보이고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평생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살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말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자기 멋 대로 사는 사람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반드시 신자가 아닌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신자라고 하더라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일 수 있다. 회당에 모여 있다는 것은 평소에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이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비록 평소에 전적으로 말씀대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말씀을 듣고는 놀라고 무언가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 신자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예수님을 보고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놀랬다.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늘 새롭고 권위 있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생활도 늘 새로워지고 풍요로워 진다.  그런 영혼이 건강한 영혼이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무슨 뜻인가? ‘가르침’은 그리스어로 ‘디다케’(Didache)라 하고, 라틴어로는 ‘독트리나’(Doctrina)라 한다. 이 말은 ‘가르침, 교훈, 원리, 원칙’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원칙이 있다.

 

식물이면 식물이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 있고 동물은 동물의 원칙이 있다. 기차는 기차의 원칙이 있고 자동차는 자동차의 원칙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인간의 원칙이 있다. 그 원칙에서 벗어날 때 불행해지고 사고가 난다.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원칙이 있다. 원칙은 하나의 질서이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이며 동시에 개성이고 특성이다.


이런 원칙이 무시될 때 혼란이 오고 불행해진다. 인간 최초의 불행은 이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가 난 것이다.

그 결과로 모든 인간에게 불행이 온 것이다. 이제 원칙에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잃었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다.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은 바로 이런 원칙을 제시해 주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예수님께서 권위를 갖고 가르쳐 주시는 새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우리 신앙생활의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더러운 영을 내 안에서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에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악에서 해방시켜 주러 오신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은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도와 줄 수 없다. 오로지 하느님이 말씀만이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다. 권위 있는 새로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빛이 들어가면 어둠은 물러나는 법이다.

 

아무리 단단하게 얼어붙은 물도 따뜻한 햇빛이 들어가면 녹기 시작하는 법이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악에서 더러운 영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러 오신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주신다. 그 더러운 영이란 예수님의 말씀과는 맞지 않는 생각들이나 사고들일 수도 있다.


오늘 복음은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그 가르침을 듣고 새로운 가르침으로 깨닫고 그 소문이 곧바로 온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이 새로운 가르침이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내 안에서 널리 퍼져 나가야 하고 또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마르코 복음은 앞으로 이 새로운 가르침이 점차로 퍼져 나가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가를 전해 줄 것이다. 마치 마른 사막에 물이 흘러 들어가서 생기를 되찾아 주듯이 새로운 가르침이 내 마음 안에 놀라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또 귄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질 때 하느님의 나라는 그만큼 많이 건설될 것이다.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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