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Re :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작성자배봉균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9 조회수628 추천수6 반대(0) 신고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신희상
 

 

 

(여기 저기서 퍼온 글입니다. 읽어보니 역사의 이유를 알 수가 있더군요..)

(읽는데는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아이큐가 좀 더 높아짐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신규장각 독서토론회에서 만난 이덕일님은 개인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분이었다. 화려한 글솜씨와는 다르게 약간은 어눌한 말투를 가지고 계셨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투하며, 단호한 소신의 피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단점을 보이지 않게 했다.

이 책은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 정약용의 집안 이야기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읽다보면 정조대왕의 시대와 그 뒤를 이은 순조 시대를 겪으면서 조선이 어떻게 쇄국의 길을 거쳐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를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조선후기 역사에 대한 서사이다.

정약용의 형제는 이복 맏형 약현, 동복형 약전과 약종, 그리고 누나가 하나 있었다. 정약용의 집안은 특히 천주교와의 인연을 빼 놓을 수 없는데, 조선후기에 전파된 천주교에 대한 역사를 연구하다보면 정약용의 형제를 빼 놓을 수 없다.  형제들을 순서대로 정리해서 그들의 업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정약현 (이복 맏형)
조선천주교를 창립한 시조인 이벽이 정약현의 처남이었다. 이벽은 정약용이 학맥의 스승으로 모셨던 성호 이익선생의 종손이자 정약용이 천재라고 불렀던 이가환의 집안이었으며, 정약용이 특히 학문적으로 많이 의지했던 사람이다. 아울러 정약현의 딸의 남편이 되는 사람이 황사영으로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 사위다. 황사영은 사실 정약용의 고발로 체포되게 되는데, 이 때 황사영은 조선에서 탄압받고 순교하던 사람들의 사연을 모두 기록하고,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중국의 천주교 주교에게 보내기 위한 백서(帛書, 여기서 한자 帛은 비단이란 뜻)를 써서 가지고 있다가 잡혔는데, 이 백서는 군사적인 도움의 내용까지 담고 있어서, 천주교 탄압의 큰 빌미를 제공한다.

 

▶ 정약전 (동복 둘째형)
흑산도에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지었으며, 평생 친구이자 유일한 동지였던 존재였다. 자산어보에 첫번째로 나오는 물고기는 홍어다.

 

▶ 정약종 (동복 세째형)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사람으로 제사문제로 1791년 정약용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과의 의를 끊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 후 천주교 순교자가 된다. 형들보다 천주교를 가장 늦게 알게 되나 1786년 아우구스티노(Augustinu)라는 세례명을 받고 입교하는데, 아우구스티노가 젊은 시절 자신처럼 많은 방황을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정약종은 젊어서는 도교의 신선도에 많이 빠져있었다. 결국 정약종은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마자 자신을 체포하러 오는 금부도사를 찾아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목이 짤려 죽는다.

 

▶ 누나 정씨
누나의 남편이 이승훈으로 이승훈은 우리나라 최초로 영세를 받은 사람이다. 정약용이 이승훈의 처남이 되는 것이다. 이승훈의 외삼촌은 이가환으로 이가환의 중조 할아버지가 우리나라 실학의 대부분 성호 이익이었다. 이승훈 로마 카톨릭의 교황청에도 기록이 남아있는 사람으로 북경에 사신행렬에 따라 갔다가 스스로 북경의 남천주교당에 있는 외국인 신부를 찾아가 영세를 받는다. 이미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조선인 이승훈을 보고 외국인 신부는 세계 최초로 스스로 공부하여 복음을 받아들인자라며 놀라워 하며 교황청으로 서신을 보낸다. 이때 이승훈이 받은 세례명은 '베드로'. 한국 천주교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승훈도 순조 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순교한다. 그의 아들 이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자 이연구와 균구는 1871년 각각 순교했다.

 

▶ 정약용
정약용은 제사의 문제에서 천주교의 신앙을 버리게 된다. 귀양가 있는 동안에는 주역을 연구하여 많은 연구성과를 남기기도 하는데, 천재형이자 노력파였고,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던 해에 태어났던 정약용을 정조대왕은 많이 아끼고도 사랑해 주었다.

노론의 정치적 공세에 실망해 정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낙향에 있던 정약용에게 정조는 사람을 보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했다. 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고 싶어서 주자소의 벽을 새로 발랐다. 아직 덜 말라 정결하지 못하지만 그믐께즘이면 들어와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동지이자 학문적인 교류자였던 정조와 정약용은 서로 농담도 주고 받고, 또 정조는 술을 먹지 않는 정약용에게 붓을 담는 옥으로 만든 필통에다 가득부어 술을 주기도 하고, 일부러 한사발을 다 마시게 해 취하게 만들기도 하고 하면서 인간적인 교류를 했다고 한다. 윗글은 정조가 정약용에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교실을 새로이 꾸미고, 도배까지 다 해 놓았으니, 다시 오라는 말인데, 정조대왕의 품성과 정약용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정조대왕의 사후 정약용은 18년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을 하고, 고향인 마재로 돌아와 75세인 1836년 결혼한지 60년 되는 회혼일에 죽는다.

 

이강길

 

전인권  봉우리  ▶를 누르세용

==============================================================================================================

 

충북 제천 배론성지

배론성지는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 치악산 건너편 산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배론성지는 안성의 미리내성지와 함께 우리나라 기독교사에서 빠질 수 없는 큰 획을 그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초기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숨어 살았고, 황사영 백서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고 또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가 이곳에서 설립되었으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배론이란 이름은 얼핏 듯기에 영어 같지만, 이 지역의 생김새가 배의 밑바닥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인 주론(舟論)에서 비롯된 이름이라 한다. 지형이 배 밑바닥 같이 생겼다는 것은 이 지역이 구학산과 박달재 사이의 긴 계곡에 위치하고 있어 양쪽이 다 솟아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원래 이름은 도점촌(陶店村)이라 한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자기를 굽던 곳인데, 신해박해 이후 조선 정조 15년(1791년)부터 이곳으로 교인들이 숨어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든 교인들 역시 옹기를 구워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 교인들은 옹기를 팔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다른 교인들과의 접촉이나 정보 수집 등을 할 수 있어 옹기장사가 은거 종교생활에 적당했다고 한다. 현재는 옹기를 굽던 흔적은 없고, 황사영이 백서를 쓴 토굴 앞에 옹기 몇 개가 놓여 있을 뿐이다.

 

배론에 첫 번째 큰 파란이 일게 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에 이어 일어난 황사영 백서 사건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신유박해에서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등 남인 세력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는데, 그때 중국인 신부였던 주문모 신부도 죽음을 당했다. 당시 천주교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황사영이 화를 피해 한양을 떠나 이곳 배론마을로 숨어들었다. 배론마을에서는 굴을 파서 황사영을 숨겨 주었고, 그 토굴 속에서 황사영은 천주교의 박해 사실을 낱낱이 적은 백서를 만들어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게 된다.


그러나 백서를 가지고 가던 황심이란 사람이 붙잡혀, 결국 황사영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백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백서 사건으로 배론마을의 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다시 뿔뿔히 흩어지고, 백서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천주교의 탄압은 더욱 강도를 더해가게 된다.
백서의 내용 중 문제가 된 부분은 대략 이런 내용이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병선 수백 척에 정병 5-6만과, 대포 등 강한 병기를 많이 싣고, 글을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3-4명을 데리고 오십시오. 그리고 이 나라의 해안에 정박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선교를 용인하고 우호 조약을 체결하도록 요구하십시오'

 

지금 보아도 상당히 큰 문제가 제기될 내용이다. 그러니 당시의 상황에서 이 백서로 인해 천주교의 박해가 가속화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일이라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현재 배론성지의 요셉 신품학당 뒤로 황사영이 숨어 지내던 토굴이 아직도 있고, 이 황사영 백서는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백서 사건 이후 50여 년이 흐른 1856년, 배론마을은 또 한 번 회오리가 일게 된다. 당시 메 스트르 신부가 이곳 배론마을의 장주기(세례명 요셉)의 집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학교 를 설립한 것이다.
당시 신학교의 운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힘들었던 모양인데, 신학교 설립 10년 후인 1866년 병인박해 때 신학교의 교장이었던 푸르티에 신부와 교사였던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 고 집주인 장주기가 모두 잡혀가 서울의 새남터에서 죽음을 당하고 신학교는 폐쇄되었다.
현재 배론성지에는 장주기(세례명 요셉)을 기리기 위한 성 요셉 성당이 개울가에 단정하게 자리잡고 있다. 또 신품학당을 재현한 초가 건물이 있는데, 실제 신학당이 있던 자리는 그 옆에 있는 강당 건물이 있는 자리라 한다.

 

그리고 배론성지에는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다. 최양업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인물이다. 신부가 된 후 열심히 목회활동을 하다가 문경의 교우촌에서 과로로 사망하자 이곳 배론성지로 이장되었다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순교를 하지는 않았지만 김대건 신부와 비견될 만한 업적을 이룬 신부라 한 다. 현재 배론성지에는 최양업 도마신부 기념성당이 커다랗게 지어져 있다. 배론성지는 그리 넓지는 않아 앞에서 말한 유적들을 둘러보고 '십자가의 길'이라 이름 붙은 산책로를 돌아도 다 돌아보는 데는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