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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도 묵주기도와 함께 걷기 운동을 하며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6 조회수771 추천수9 반대(0) 신고

 

         오늘도 묵주기도와 함께 걷기 운동을 하며




요즘도 거의 매일같이 오후에는 두세 시간씩 걷기 운동을 합니다. 요즘에는(지난 9월부터 12월까지) 일주일에 3일씩(화·목·금요일) 오후에 인근의 한 초등학교로 논술 지도를 나갑니다. '방과후 학교'의 논술부 강사로 아이들과 두 시간씩을 함께 합니다.

오후 3시 20분부터 수업을 하기 때문에 학교를 가는 날은 점심 식사 후에 1시간 걷기 운동을 하고, 저녁에 다시 1시간 걷기 운동을 합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은 마음놓고 내리 두 시간 걷기 운동을 할 수 있지만, 그런 날도 저녁에 또 1시간 걷기 운동을 합니다.

낮에 걷기 운동을 했으면서도 저녁에 다시 하는 것은, 마누라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묵주기도 하루 기본 40단을 채우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저녁에 내가 집에 없기라도 하면 마누라는 쉽게 걷기 운동을 포기해 버립니다. 저는 최근 일본 동경을 다녀왔습니다. 13일(월)에 갔다가 17일(금) 돌아왔는데, 그 5일 동안에 마누라는 겨우 하루 월요일 저녁만 혼자 걷기 운동을 했지 뭡니까. 무려 4일이나 연속으로 걷기 운동을 빼먹는 불상사가 발생한 거지요.

내가 무슨 일로 저녁에 집에 없거나 운동을 하지 않으면 마누라도 운동을 포기해 버리는 불상사 때문에, 일단은 마누라를 위해서 저녁에도 꼭 걷기 운동을 합니다. 화요일 저녁에는 미사 후 레지오 쁘레시디움 모임을 하고 온 늦은 시각에도, 수요일 저녁 미사 후에도, 금요일 저녁 미사 후 성가연습을 하고 온 늦은 시각에도 꼭 걷기 운동을 합니다. 마누라의 지나치게 풍만한 몸매를 생각하면 마누라를 위한 저녁 걷기 운동을 도저히 게을리 할 수가 없는 거지요. 나이 먹어 가는 세월에 마누라의 날씬한 몸매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1시간 걷기 운동을 하면서 묵주기도 20단을 합니다. '환희의 신비', '빛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그 네 가지 지향의 기도를 다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40'이라는 숫자를 각별하게 생각하면서 그 숫자를 내 생활 속에 '구체화'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묵주기도 하루 기본 40단'을 설정해 놓고 살므로, 그것의 실행을 위해서도 저녁에 다시 마누라와 함께 걷기 운동을 합니다.

그런데 오후 낮에 2시간 걷기 운동을 하는 날도 있고, 또 15분 거리인 학교를 가고 오며 운전대를 잡은 손으로도 묵주를 쥐기 때문에, 그리고 차를 타지 않고 시내를 걸어다닐 때도 묵주기도를 하므로 대개는 묵주기도 하루 기본 40단을 무난히 채우고 50단 60단까지 합니다. 하루에 무려 100단을 하는 날도 있습니다. 그래서 화요일 저녁 레지오 쁘레시디움 주회를 하면서 묵주기도 보고를 할 때는 400단 이상, 때로는 500단 600단씩 보고를 합니다.

나는 천주교 신자이고, 또 레지오 단원(현재 쁘레시디움 단장)이기 때문에 레지오 쁘레시디움 계획서에 숫자로 표기되는 묵주기도 실적도 내 신앙생활의 중요한 '실적'으로 여깁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그 숫자 표기 실적을 많이 쌓고 싶은 욕심을 갖습니다. 그것을 우리 성모님께서는 예쁘게 보아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내가 매일같이 바치는 하루 40단 이상의 묵주기도들이 하늘나라의 어딘가에 마련되어 있는 화단에 가지런히 오밀조밀 뿌려지고 언젠가는 함빡 꽃으로 피어나서 나를 맞아줄 것으로 믿습니다.    

걷기 운동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나로 하여금 매일같이 걷기 운동을 하게 하는 '당뇨병'도 하느님의 선물로 생각합니다. 내가 매일같이 걷기 운동을 하며 살 수 있도록 내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요즘 우리 집은 저녁상을 세 번 차립니다. 저녁에 성당에 가기 위해서 우리 부부가 먼저 식사를 하고, 7시가 넘어 동생이 퇴근해 오면 또 한번 상을 차리고, 8시가 넘어 조카녀석이 학원에서 돌아오면 또 한번 차리고….

두 번 저녁상 차리는 일은 대개 어머니가 하십니다. 올해 연세 83세이신 어머니는 그 일 때문에 몸도 더욱 고단하시고, 둘째 며느리를 잃으신 슬픔도 새록새록 크시지만, 그 고달픔과 슬픔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달게 참으시며, 하느님께서 베푸신 십자가 은총으로 여기십니다.

우리 부부는 노친께 그 일을 맡기고 성당에 가는 것이, 또 걷기 운동을 나가는 것이 무척 죄송스럽지만(직장 생활을 하는 마누라가 저녁 회식을 하고 들어오는 날들도 있고, 더러는 노친께서 신세 한탄을 하시는 때도 있지만), 그 모든 일이 어머니 덕분임을 생각하며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내리 두 시간 이상 걷기 운동을 할 때는 가끔 이런 생각도 합니다. 내가 묵주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매일같이 두 시간 이상 걷기 운동을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니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그건 얼마나 무미건조한 일일까? '기도 실적'과 함께 하지 않는 그 일에 과연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 물론 무종교인들에게는(그리고 묵주기도가 없는 타종교인들에게는) 무미건조함 따위는 아예 문제조차 되지 않을 테지만….

내 주변에는 묵주기도를 하지 않고서도 매일같이 하루 2시간 정도를 걸으며 사시는, 신앙이 없는 채로 연세 70을 넘기신 분도 있지만, 그 분을 생각하면 매일같이 묵주기도를 하며 걷기 운동을 하는 내가 더욱 다행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겨집니다.

옛날에는 묵주기도를 단순히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로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묵주기도는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묵주기도는 내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고, 기도에 더욱 열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나는 묵주기도가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라는 사실이 참으로 좋습니다. 내가 지금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즐겁습니다. 그 사실에서 내가 지금 '어머니와 함께 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 사실에서 어머니의 '정'을 느낍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오늘도 왕복 30리 길을 혼자 걷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실감하게 됩니다. 어머니와 함께 걷고 있다는 '육감' 같은 것도 얻게 됩니다. 이 길을(이 기도하는 길을) 어머니와 함께 걷고 있다는 그 '체감' 같은 것을, 그 신비스럽기도 한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함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묵주기도를 하면서 '환희의 신비', '빛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등 매단의 지향들을 가슴에 새기며, 그 지향들이 제시해주는 성서 속의 사건들과 여러 가지 연상 장면들을 머리에 그려보는 것은 묵주기도의 가치와 중요성을 더욱 일깨워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없이 반복하는 것이지만, 성모님께 바치는 '성모송'이 얼마나 중대하고도 아름다운 기도인지를 절절히 체감하곤 합니다.

어느 날 묵주기도를 하며 시내를 걷는 내게 어떤 분이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를 공경하느냐? 성경 어디에 마리아를 공경하라는 말이 있느냐?" 그래서 제가 그 분께 물었습니다. "그럼, 성경 어디에 마리아를 공경하지 말라는 말이 있느냐?" 그랬더니 그 분이 답변을 못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시니까,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께 와서 예수님의 잉태를 알릴 때 뭐라고 했는지도 잘 아시겠네요.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께 무슨 말로 예수님의 잉태를 알렸는지, 성경에 기록된 그 대목을 좀 소개해주시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계시는 그 분은 그 대목을 전혀 모르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드렸지요.

"천주교에는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보편 기도가 있습니다. 성모송이라고 하는 기도는 우선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께 예수님의 잉태를 알릴 때 하신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이 말씀을 잘 음미해 보십시오. '은총'은 성령을 뜻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하느님 성부를 뜻하는 말이고요.  

이 간단한 말속에 엄청난 신비가 깃들여 있습니다. 마리아라는 한 여인 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들어 있는 겁니다. 이 놀라운 신비의 말씀 안에서,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딸이고, 정배이고, 어머니이시며, 영원히 그렇게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님은 당연히 교회의 어머니이시고 인류의 어머니이신 거지요.

그런데 천주교는 이런 말로 그 성모송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님께 '전구(轉求)'를 부탁드리는 거지요. 내가 이 세상에 살 때나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갔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면서 나의 어머니이신 분께서 나를 위해서 주님께 빌어주시면 효력이 크고 또 확실할 테니까요."

이 말을 들은 그 분은 말없이 몸을 돌리더군요. 이미 그 전에 인터넷 내 홈페이지 안에서 벌어졌던 그 일이 실제의 생활 가운데서도 일어난 것이지요.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묵주기도를 할 때는 자주 그 분을 떠올리곤 합니다. 전혀 모르는 사이인 내게(내 손에 들린 묵주를 보고, 묵주가 뭔지는 알았는지…) 먼저 말을 걸어올 정도로 꽤 공격적인 성격을 지니신 듯한 그 분이 그 후 성경을 다시 읽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묵주기도를 하면서 '성모송'의 마지막 구절을 할 때는 좀더 간절한 마음이 되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 구절의 의미를 깊이 아로새기곤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성모 마리아님께 '하늘의 모후', '천주의 모친', '성령의 정배' 등등 최고 공경의 호칭을 드리지만 그것은 결코 흠숭(欽崇)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새깁니다. 성모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의 결구는 '빌어주소서'임을, 그 의미를 깊이 받듭니다.

성모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전구를 해주시면, 그리고 성모님의 전구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을 받게 되면 성모님의 전구가 곧 나를 구하시는 것이기도 하니, '성모 마리아님, 저를 구하소서'라고 기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간혹 특별한 상황에서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기도할 수 있겠지만, 그 말 역시 성모님의 전구를 비는 뜻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구의 뜻을 지니지 않은 채 그런 기도를 한다면, 더욱이 공개적으로 그런 식의 기도를 한다면 성모님께서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외려 민망한 마음을 지니실 듯싶습니다.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성모님께 민망함을 안겨 드리는 상태, 그것은 우리 신자들이 챙겨 드려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끔 집으로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내 어머니께도 깎듯이 인사드리는 것을 보면 한결 정답고 고맙게 느껴집니다. 거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찾아 굳이 방에까지 들어가서 인사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곱빼기로 정다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인지상정이고 당연지사일 것입니다.

그것을 잘 헤아리고 사는지라 나도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우선 그 집의 어른부터 뵙고 인사를 드리는 습관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나 미덕 역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한가지일 것으로 믿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는 예수님에게서 인간적인 정을 많이 느낍니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시는 예수님을 보고 먼 육로로 달려오는 군중들을 측은한 눈으로 보시는 예수님, 그리고 "예언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등에서 많은 것을 느낍니다. 그런 내 감정들이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는 시초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사람으로 오시어 사람으로 생활하시고 사람의 고통을 다 겪으며 돌아가신 예수님은 오늘도 유대 지방 고향에서는 대접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님에 대한 그 믿음 때문에 당신의 어머니를 홀대하며 여러 가지 말로 마구 모독하는 현상을 보고 계십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상태에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며 "네 어머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효심을 본받아 실생활 속에서 자기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며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인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님께 공경의 예를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께 대한 공경이 지나치거나 각도가 빗나가서 함부로 ‘사적 계시’를 들먹이고, 교회에서 인정하지 않은(인정할 수 없는) ‘공동 구속자’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성모님을 민망하게 해드리고 예수님의 마음까지 아프게 해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잘 헤아리는 것도 올바른 신앙생활일 것 같습니다.

요즘 며칠 동안 가톨릭 굿 뉴스 자유게시판을 뒤덮은 성모 신심과 관련하는 신앙심 깊은 교우 여러분의 논쟁을 유심히 보면서도 끝내 참견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자매님 한 분이 제게 ‘쪽지’를 보내 의견을 물으셨습니다. 제 의견을 듣고 싶으신 마음이 크신 것 같아서(그 자매님의 요청을 외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 같아서) 논조 같은 방법은 피하고 그냥 소박한 생활문 형태로 조심스럽게 제 의견을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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