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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주년 결혼기념일에 계룡산을 오르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5 조회수526 추천수6 반대(0) 신고
            20주년 결혼기념일에 계룡산을 오르다 
                         "신부한테 겨우 돼지곱창 찌개...웃음이 나와요?"
      



결혼 날짜 모르는 어머니, 20주년 결혼기념 말해야 하나

어머니는 당신의 결혼 날짜를 기억하시지 못한다. 평생 '결혼기념일'이란 걸 모르고 살아오셨다. 그런 어머니께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말씀드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송구스런 일이었다. 또 지지난해 12월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된 동생에게 형의 결혼기념일을 알리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다.

엄마 잃은 두 어린 조카(중1, 초3)들을 데리고 사는데다가, 동생이 퇴근을 하면 일단 형 집으로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자기 집에서 혼자 먹을 아침밥을 가지고 가는(밥 바구니를 챙겨 주어야 하는) 우리 집 형편에서는 우리 부부가 이틀씩이나 집을 떠나 결혼기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을 생각해서 올해 20주년 결혼기념일을 슬며시 넘어갈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 무렵에 '가족 여행'을 해볼 요량으로 1년 이상 모았던 <오마이뉴스> 원고료 150만원도 지난해 12월 대성당(새 성전)에 안치할 어머니의 주보 성인(안나)상 값으로 봉헌을 한 상황이기도 했다.


▲ 20주년 결혼기념일에 보령시 청라면 옥계리 친정 어머니의 묘소를 찾고...  
ⓒ 지요하

하지만 '20'이라는 '마디숫자'를 외면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이 마흔과 서른 넷에 결혼한 부부의 20주년 결혼기념일은 적령기에 결혼한 다른 부부들의 그것보다 좀더 각별함이 있을 터였다. 결혼생활 겨우 20년에 이순(耳順), 초로의 세월로 접어들어 버린 내 형편에서는 더더욱 어떤 애틋함도 있을 성싶었다.

생각하면 20년 세월이 참으로 순탄하지 않았다. 만고풍상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꽤나 기구한 사연과 곡절들을 만들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장장 10년에 걸친 '보증 빚'도 다 갚고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한 다음 새 아파트를 장만하여 이제는 좀 쾌적한 분위기 속에서 안온한 생활을 하려나 했더니, 제수씨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사정이 달라지고 말았다.

여든이 훨씬 넘으신 연세에도 일손을 놓지 못하시는 어머니의 말년 고생이 가장 애처롭지만, 아내도 어렵고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 신앙이 버팀목이 되어주고 중심을 잡아주기에 그래도 우리 가족은 화목 속에서 산다. 그 화목의 요체들을 잘 인식하는 가운데서 우리 가족은 서로서로 감사하며 산다.

그런 연유로, 아내의 노고를 위로하는 것도 화목의 한 가지 요체임을 나는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주년 결혼기념일에 부부 함께 한 이틀 바람을 쐬고 올 계획을 세우고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방학을 맞아 대학생 딸아이가 집에 와 있는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느새 성년이 된 딸아이가 잠시 엄마 역할을 맡아주는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사별하고 혼자인 동생, 결혼기념일 이야기하기 미안해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인 지난 10일은 수요일이었다. 매주 한 번씩 해미성지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날이었다. 하지만 10일의 홀가분한 출타를 위해서 우리 부부는 해미성지 물 긷는 일을 하루 전에 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10일 오전 10시쯤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면서 어머니께 색다른 부탁을 드렸다. 저녁에 동생이 집에 오면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 얘기를 하지 말고 그냥 다른 볼 일로 출타를 했노라는 정도로 말씀을 하시라는 부탁이었다.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된 동생에게 형의 20주년 결혼기념일을 알도록 한다는 건 적이 미안한 일이었다.

원래는 철도공사의 철도여행 상품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철도여행 상품들을 알아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하나같이 단체가 아니면 신청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열차 출발 시간이 서울이나 대전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는 핸디캡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철도여행을 포기하고 내 승합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다행히 날씨가 도와주었다. 20년 전의 그 날처럼 하늘은 맑고 별로 춥지도 않았다. 우리가 왜 하필이면 위험 부담이 많은 한 겨울철에 결혼을 했는지 새삼스럽게 그 이유를 궁금해했고, 이틀 동안 날씨가 좋기를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나는 마누라에게 다시 한번 '도고 호텔' 일박을 제의했다. 하지만 마누라는 도리질을 했다. 그러더니 20년 전의 실망과 섭섭했던 마음을 다시금 반추했다. 동남아 쪽으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도 많았고, 제주도는 기본이던 시절이었다. 남들처럼 최소한 제주도는 갈 줄 알았는데, 태안에서 멀지도 않은 도고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간다는 것이 아내는 어이없었노라고 했다.


▲ 공주시 금강다리 근처 분위기 있는 찻집에서 정영진 화백과 함께 금강의 야경을 즐기며...  
ⓒ 지요하

"세상에 나이를 마흔이나 먹고 결혼하는 사람이 신혼여행 계획을 그렇게밖에 못 짰다니…. 거기다가 카메라를 준비하기를 했나,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니께."
"아니, 그때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두 안헌 사람이 왜 지금 와서 그 얘기를 또 헌디야? 난 이미 예전부터 미안헌 마음이 바지게루 한 짐인디…."
"미안한 마음이 바지게로 한 짐인 사람이 그래요?"
"뭐가 어때서 그려? 비록 승합차지먼 20년 전이는 읎던 내 차도 이용을 허겄다, 20년 전이는 생각두 뭇 헸던 디카두 준비를 혔겄다, 이만허면 됐지, 나이를 쉰 넷이나 먹은 여자가 뭔 불만이 그리 많은 겨? 내일까지는 당신이 허자는 대루 다 헐 팅께 20년 전의 불만일랑 다시 꺼내지를 말어. 난 그래두 그때를 생각허면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오는디…."
"신부한테 겨우 돼지곱창 찌개를 사주고 많이 먹으라고 허구서는 혼자 다 먹은 사람이니, 뭔 웃음인들 안 나오겠어요."

우리는 이렇게 한차례 설전을 하며, 맨 먼저 태안읍 남산리, 태안천주교회 공동묘지엘 들렀다. 우리 부부의 20주년 결혼기념일에 아버님 묘소부터 들러 절을 올리고 나들이를 하는 게 온당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버님 묘소 앞에서 기도를 하고 절을 올린 다음에는 제수씨의 묘 쪽으로 이동했다.

세상 떠난 제수씨에게도 묘하게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제수씨 묘를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제수씨의 묘 앞을 떠날 때 아내는 눈물을 지었다.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렀으면 했는데…. 20주년 결혼기념일 나들이를 허면서 초장부터 마누라 눈에서 눈물을 봐야 허겄수?"

아내는 볼멘소리를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한숨을 쉬며 아내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장모님 묘소 지나 중신아비 방문... 20주년 결혼기념식 경로

천수만 제방 길을 달린 다음 홍성 IC로 들어가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릴 때서야 아내는 다음 행선지를 눈치 챘다. 우리는 보령시 청라면 옥계리의 묘소에 도착했다. 4년 전에 작고하신 장모님의 묘소였다. 장모님 묘 옆에는 지난해 별세하신 처조모와 예전에 타계하신 처조부의 합장 묘도 있었다. 우리는 대천휴게소에서 사 가지고 온 떡을 두 묘 사이에 놓고 차례로 절을 올렸다.

그리고 우리는 대전으로 향했다. 두 사람 모두 시장기가 없어서 점심은 달리는 차 안에서 가볍게 호떡으로 해결했다. 오후 2시쯤 대전시 서구 갈마동 갈마아파트에 도착했다. 갈마아파트 101동에는 내 영세 대자이면서 우리 부부의 중신아비인 가명현 교사(전교조 대전지부 전 사무국장)와 역시 초등 교사인 큰처남이 살고 있었다.

가명현 교사와 큰처남이 한 학교에 근무할 때 서로 얘기가 맞아 우리 부부는 대전의 한 다방에서 맞선을 보게 되었고, 그 일로 말미암아 내 대자는 우리 부부의 중신아비라는 인연을 하나 더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큰처남 집을 찾았다. 중병을 앓고 있는 큰처남 댁을 문병하려는 뜻이었다. 큰처남은 공주에 있는 아버지의 아파트를 물려받아 살다가 큰처남 댁이 살림을 할 수 없는 사정에 따라 지난해 가을 서둘러 맨 먼저 결혼시킨 막내(셋째) 아들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큰처남 댁의 모습은 너무도 안쓰러웠다. 머릿속 깊숙한 곳에 생긴 혹이(너무 예민한 곳이라서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로) 자랄 대로 자라서 이제는 예쁘던 본 얼굴이 전혀 아니었다. 아내는 또 눈물을 지었고, 우리 부부는 개신교 신자들인 처남 부부 앞에서 천주교식 기도를 했다.

우리는 준비해간 봉투를 큰처남에게 주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가명현 교사의 집을 들렀으나 부부 모두 출타 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20주년 결혼기념일에 맘먹고 찾은 중신아비를 보지 못한 것은 섭섭한 일이었다.

아내 친구 집 기습 방문... 자정 넘게까지 소주잔 기울이고


▲ 정영진 화백의 침실. 주인을 쫓아내고 우리 부부가 20주년 결혼기념일을 이 방에서 장식했다.  
ⓒ 지요하

아내의 뜻에 따라 우리는 도고온천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로 향했다. 계룡산 기슭에서 그림을 그리며 홀로 생활하는 정영진 화백과 하룻밤을 함께 할 생각이었다.

아내와 공주사대부고 15회 동기이며, 지난해 11월 서울 '갤러리 영'의 초대전 형식으로 개인전을 가진 바 있는 정영진 화백은 우리 부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부부가 20주년 결혼기념일에 자신을 찾아준 것을 무척 고마워했다.

우리는 계룡산 갑사 부근의 한 음식점에서 송어회로 저녁을 즐겼고, 공주 시내로 나가 금강다리 옆의 분위기 있는 찻집에서 한방 차를 마시며 금강의 야경에 취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 화백의 집으로 가서 대들보며 서까래들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옛 시골집의 정취 속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정 화백과 자정이 넘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정 화백의 침실에서 잠을 잤다. 정 화백은 우리 부부에게 침실을 내주고 자신은 마을의 후배 집에 가서 잔다고 한밤중에 집을 나갔다. 우리는 정 화백이 난로가 있는 화실에서 잘 줄 알았는데, 이부자리가 없어서 화실에서는 잘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우리 부부는 무슨 사정으로 예전에 아내와 헤어져 계룡산 기슭으로 거처를 옮기고 혼자 살고 있는 정 화백을 쫓아내고 혼자 사는 사람의 침대에서 20주년 결혼기념일을 기념한 셈이었다. 정 화백이 과연 마을의 후배 집에서 잤는지도 알 수 없고, 생각하면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갑사 아래 음식점에서 아침식사를 한 다음 계룡산을 올랐다. 함께 산을 오르기로 한 정 화백은 아침에 예고 없이 찾아온 서울 손님 때문에 동행을 하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눈이 남아 있는 산길을 조심조심 올랐다.

우리 부부가 결혼 이후 함께 계룡산을 찾기는 이번이 네 번째였다. 결혼 초 신혼여행을 마치고 처가를 찾았을 때 가운데 처제 부부와 당시 대학생이었던 막내 처제와 함께 갑사 구경을 했는데, 그때가 나로서는 최초 계룡산 상면이었다.

계룡산을 정상 중의 한 곳인 '금잔디고개'까지 오르기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1993년인가, 아내가 전체 교직원이 10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에 근무할 때, 직원 친목여행에 내 승합차로 운전봉사를 하면서 함께 계룡산 금잔디까지 올랐는데, 그때로부터 무려 13년만이었다. 지난해 4월에도 공주사대부고 15회 동창 모임 덕에 계룡산에 왔지만, 산을 오르지는 못했다.


▲ 계룡산의 은선폭포에서. 옛날 소녀 시절에 막내 처제가 이 폭포로 떨어진 사연이 있다고 했다. 산을 거뜬히 오르기는 해도, 내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나이가 보인다.  
ⓒ 지요하

우리 부부는 땀을 흘리며 금잔디고개까지 오르는데 성공했다. 태안 백화산의 두 배도 넘는 높이였다. 산을 목적지까지 오른다는 것은 뿌듯한 성취감을 갖게 한다. 힘을 들인 만큼 성취감은 뿌듯하기 마련이다.

마침 금잔디고개에서는 대전의 한 건설회사 직원들이 '기원제'를 지내고 나서 음복을 하고 있었다. 음식이 푸짐했고, 기원제 음식을 여러 사람과 나누고자 하는 인심도 푸근했다. 우리 부부는 먹을 복이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며 음식을 즐겼다.

결혼 2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부부가 계룡산을 올랐다는 사실이 참으로 의미 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비행기 타고 여행을 한 것보다도, 아버님과 장모님의 묘소를 차례로 들르고, 큰처남 댁 문병도 하고, 중신아비 집도 찾고(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신혼 시절의 추억이 어려 있는 계룡산을 올랐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한 마음을 갖게 했다.

우리 부부는 산을 내려오면서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며, 남은 인생을 하느님 신앙 안에서 더욱 참되게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빙판으로 다소 미끄러운 산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면서도 두 사람 모두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다.  


  2007-01-15 14:10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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