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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4.18)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4-18 조회수9,030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7년 4월 1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제1독서 사도 2,36-41

오순절에,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복음 요한 20,11-18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늘 아내의 말을 듣고 따라주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당신이 틀렸어요.”

라고 말하면, 자신이 분명히

맞는데도 불구하고 “알았어.”

라고 말하면서 아내의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내가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왜 자꾸 나한테 져주는 거야?”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내 사람인데,

내가 당신과

싸워 이겨서 뭐해?

내가 당신과 싸워 이기면

당신을 잃는 것이고,

당신을 잃으면

진 것과 마찬가지야.”
남편의 지는 이유를

다시금 새겨 봅니다.

자신의 말이 맞는데도

상대방에게 지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이기는 대상이 아니라

져 줄 수도 있는 이해해 줄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기는 것에만 집중하다보니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투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상대방에게

이기려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상대방이 분명히 틀렸는데

고집을 꺾지 않아서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틀린 것만이 가득한 사람을,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면서

헤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이해하는 것이고,

사랑을 위해서는 무조건

져 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당시의 죄인들처럼

큰 죄를 지어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 죽음을 당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셨고,

주님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이 틀렸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던 것은

사랑을 위해 우리들에게

져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모범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에게 배웁니다.

그녀는 제자들이 무덤 안을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남아 있었다.

마리아의 사랑은 그녀가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했고

다시 한 번 무덤 안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모두가 등을 돌려서

떠날 때에도 다시 바라보고

다시 돌아보는 사랑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 결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했지요.

그러나 조금씩 당신을

드러내 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결국 마리아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참 많이

이야기하고 또 듣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그리고 마리아가 보여 주신

사랑을 바로 우리의 사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은

타인에게 얽매여 있다.

타인을 사랑하는데

인생의 반을 소모하고,

나머지 반은 타인을

비난하는데 소모한다.

(주베르)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성당.

특히하게 제대가 배 모양입니다.

"즐거움은 여기에"

“현재가 즐겁지 않다면

그 어느 곳에도 즐거움은 없다.

하던 일을 바꾼다 한들

새로움은 잠시뿐,

기대감은 또다시

실망으로 변한다.

다른 곳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 여기를 주목하라.

즐거움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생의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보낸

정약용 선생님이지요.

 많은 제약이 있는 곳이지만

그 안에서 특히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을 찾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면 즐거울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즐거움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고통과

시련 옆에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즐거움을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구매하기

위해서 시장을 돌아다니면

어떻습니까?

구매하기 위한 물건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려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도저히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물어서라도

찾으려고 합니다. 

즐거움 역시 내가

보려고 하면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찾을 수 없다면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분명히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카페에서 본 예쁜 장식품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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