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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괴짜수녀일기] ‘불쌍히’증후군 <21>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2 조회수926 추천수11 반대(0) 신고

              

 

                       ‘불쌍히’증후군

                                

   새 미사통상문에 ‘불쌍히 여기소서.’가 ‘자비를 베푸소서.’로 바뀐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해본다. 여기에는 몇 달 전 세례를 받은 마리아 할머니와의 숨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든 살 된 이분을 위해 두 달 동안 방문교리를 했는데, 글을 모를 뿐 아니라 기억력마저 쇠퇴해진 할머니에게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을 설명해도 대답은 언제나“잊어버렸어”였다.


   하는 수 없이 비상수단으로 묵주를 한알 한알 굴리면서 화살기도를 하도록 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를 도우소서.”등은 잘 외었다. 그런데“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대목만 나오면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불쌍히’란 말이 할머니로 하여금 목을 메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분 딸에게서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대해 들으며 나 또한 목이 메이고 말았다.


   할머니가 시집을 가자마자 남편 되는 사람은 즉시 딴 살림을 차렸다. 가끔씩 들른 남편과의 사이에 딸 셋을 두게 되었는데, 막내딸이 열세 살 되던 해에 남편은 그나마 왕래하던 발길을 아주 끊었다. 할머니는 큰딸 집에 살면서 지금껏 식모처럼 일만 했는데 큰딸이 암으로 세상을 먼저 떴고, 둘째딸마저 교통사고로 떠났으며, 하나 남은 딸도 일 년 전 남편을 먼저 보내 홀로 되었다. 그 막내딸이 혼자 살고 있는 노모를 억지로 모셔오긴 했으니 평소에 서로에게 쌓인 정이 없어서인지 노모는 항상 남의 집(?)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더란다. 무엇보다 노모의 영혼을 걱정하는 딸의 심정이 가슴 가득 밀려왔다. 아무튼 그 다음부터는 나는 ‘불쌍히’라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빼야만 했다.


   할머니가 하는 일이란 종일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일 이었다. 나는 옳다구나,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주면 좋은 교리공부가 되겠다 싶어 우선 ‘예수의 생애’를 보여 드렸다. 그러나 우리말로 더빙된 게 아니라 자막으로만 나오니 낭패였다. 할 수 없이 할머니 곁에 앉아 설명을 해드리는 수밖에. 시청각 교육은 주효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감은 조금 잡힌 것 같았으니 말이다. 며칠 뒤 방문해보니 할머니의 딸이,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 언제냐고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할머니, 예수님이 언제 태어났지요?”

   “사월 초파일.”

   할머니는 모처럼 자신 있게 대답한 말에 우리는 박장대소했다.


   그 후 할머니는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 응급실에 모셔졌으나 지금은 많이 회복 되었다. 다시 살려주신 하느님께 기도하자고 하면 할머니는 여전히 “하느님, 고맙습니다.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아무것도 모릅니다.”라고 기도 하신다. 그러나 그렇게 죽었다가 살아났는데도 아직 ‘불쌍히’라는 말에는 면역이 생기지 않았나보다. 오히려 할머니의 삶 이야기를 들은 나에게 그 증세를 옮겨놓았으니.


         - 이호자 마지아 수녀(서울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前 애화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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