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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건망증이 점점 심해지기는 하지만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2 조회수611 추천수11 반대(0) 신고
            내 건망증이 점점 심해지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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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중반, 언걸먹은 죄로 매월 200여 만원씩 빚잔치를 하며 살던 시절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마누라 월급을 거의 빼앗기고 곱다시 쪼들리며 사는 세월이었다. 내가 잘 팔리는 인기 작가이길 한가, 소설 집필에 전력 투구하며 살 수 있는 신세이길 한가, 오로지 세월 하나가 약일 뿐이었다.

거의 막막 지경인 그 오종종한 처지에서 내가 생각해낸 묘안이 하나 있었다. 돌파구나 다름없는 묘안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기업체들이 발간하는 사보들을 모았다. 작가들의 콩트를 싣는 사보인가 아닌가 확인한 다음, 사보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선 내 소개부터 한 다음(사보 편집자들 중에는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을 만날 때는 어찌나 고마웠는지…), "왜 나한테는 콩트 청탁을 안 하십니까? 나한테도 콩트 청탁 좀 하십시오"라는 말을 했다.

말하자면 원고 청탁을 구걸한 셈이었다. 그러면 대개는 즉석에서 청탁을 했다. 나중에 정중히 '원고 청탁서'를 보내오는 곳도 있었다. 하여간 그런 식으로 원고 청탁을 구걸해서 한 달에 몇 건씩 원고 청탁을 쌓아놓고 콩트를 썼다.

사보에 콩트를 쓰면 대개 기십만원씩 생겼다. 기업체의 사보들은 그 시절에도 대개 장당 1만원 정도의 고료를 주었다. 무려 2만원을 주는 곳도 있었다. 매수가 많지 않으니 큰돈은 아니지만, 20매 정도의 콩트 한 편 쓰고 기십만원을 버는 것은 짭짤한 맛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마누라 월급 다 빼앗기고 허덕거리는 너덜겅 처지에서 한 달에 몇 편씩 사보들에 콩트를 쓰고 버는 고료 수입은 정말 내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내게 콩트 거리는 많이 생겨나지 않았다. 한 달에 콩트를 몇 개씩 계속해서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콩트든 소설이든 글감이란 건 원래 돌발적으로, 때로는 우연히 생겨나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일러 '영감'이라고 하고 '착상'이라고 하는 것일 터였다. 결코 억지로 짜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구걸을 해서 받아놓은 청탁서에 명시되어 있는 원고 마감 날짜는 내게 큰 스트레스를 안겨주곤 했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글을 쓰고 이메일로 원고를 보내주고 하는 시절이 아니었다. 원고지에 육필로 글을 쓰고, 그걸 가지고 우체국으로 달려가서 '등기 속달'로 우송을 하던 시절이었다.

원고 마감 전날까지도 글감이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한 때도 있었다. 세상없어도 오늘은 콩트를 꼭 해결해서 원고 마감 날인 내일 아침에라도 속달로 부치고 나서 전화를 해주어야지 하며 '전의'를 가다듬는데도 하루해가 다 지나도록 글감은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에 다른 사보에 주었던 콩트를 슬쩍 제목을 바꾸어서 보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작가의 양심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무조건 책상 앞에 앉고 보았다. 책상 앞에 붙어 앉아서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는 사이에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더니 어느새 자정이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내 눈에서 마구 눈물이 쏟아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려 원고지를 적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자 순간적으로 글감이 부옇게 떠올라서 나는 그 날 새벽에 콩트 하나를 해결할 수 있었다. 소설도 아닌, 고작 20매 짜리 콩트 하나를 쓰느라고 밤을 새우고 눈물까지 흘린 내 꼴이 우습고 창피하긴 하지만, 나는 그렇게 곤고(困苦)했던 내 삶의 기억 한 가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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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원고 마감 날이 코앞에 닥쳤을 때까지(사보의 사외 원고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 확인 다짐까지 했건만) 글감이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한 날이 있었다. 자꾸 엉뚱한 생각만 들었다. 내 이제부터는 곧 죽어도 사보들에 전화를 걸어 콩트 청탁을 구걸하는 짓을 다시 하지 않으리라. 주변 애·경사 부조를 모조리 생략하고, 딸아이 피아노학원비를 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콩트 청탁을 구걸하지 않으리라.

그럴 때 평소 건망증이 심한 마누라의 또 한번의 기가 막힌 건망증을 목도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포복절도할 정도의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내게 재미있는 글감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때의 마누라의 건망증 내용을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마누라의 건망증에 감사했다. 마누라의 건망증 덕분에 나는 독자들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 하는 콩트를 하나 쓸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마누라의 건망증을 목도하곤 한다. 살다보면 건망증 때문에 생기는 일도 많기 마련이다. 때로는 화도 나지만, 대체로 관용하는 편이다. 마누라의 건망증은 결코 마누라만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건망증 때문에 몇 년 전에 우리 동네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킨 어느 주부 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없지 않지만, 마누라가 결코 남편 얼굴을 잊어먹거나 자기 학급 애들 이름도 잊어먹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도 건망증 선수가 되어 가고 있음을 고백치 않을 수 없다. 나는 내 건망증을 확인하게 될 때마다 마누라 탓을 한다. 마누라를 닮아간다는 말을 하곤 한다. 마누라는 "왜 내 탓을 해요? 부부라고 해서 건망증까지 닮으라는 법은 없어요"라고 불만을 표하지만 '부창부수(婦唱夫隨)'라는 내 표현이 그렇게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내 건망증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흔한 것이 외출을 할 때 아파트 문을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를 모르는 일이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른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주변 애·경사에 갔다가 부조금 봉투를 그냥 호주머니에 넣고 나온 바람에 다시 가는 일도 종종 있는 일이다.

아끼는 모자를 잃어버린 일도 벌써 세 번이나 된다. 옛날에는 절대로 모자만큼은 잊지 않는다는 자신감으로 다른 물건을 모자와 함께 놓곤 했다. 하지만 벗어놓은 모자를 깜빡 잊어 챙기지 못한 일이 거듭된 뒤로는 모자를 믿지 않게 되었다.

벗어놓은 모자를 잊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내가 지금 모자를 쓰고 있는지 벗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간혹 내가 깎듯이 예의를 차려야 할 분과 인사를 나눌 때도 모자를 벗지 않는 때가 더러 있다. 나중에서야 내가 모자를 쓴 채로 인사를 나눈 사실을 알아차리고 혀를 찬 적도 여러 번이다. 그분이 나를 예의 없는 사람으로 오해하시지는 않을지….

디지털 시대에 인터넷에 즐겨 글을 쓰다보니 자연스럽게 디지털 카메라를 장만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물건을 제대로 사용하지를 못한다. 미리 카메라 생각을 했으면서도, 카메라 휴대가 꼭 필요한 자리에 그만 카메라를 놓고 간 바람에 혀를 차는 일도 다반사다.

내 건망증이 앞으로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발전할지 은근히 겁이 나기도 한다. 오늘도 당뇨약을 두 번 먹었다. 아침에 당뇨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른다는 말을 하면서도 안 먹은 것 같아서 먹었는데, 지금 몸에서 기운이 빠지는 등 저혈당 증세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당뇨약을 두 번 먹은 것이 확실하다.

앞으로는 당뇨약을 먹을 때마다 약을 싸고 있던 캡을 꺾어서 없애는 식으로 표시를 삼자는 생각을 오늘에서야 처음 하고 있는데 이 묘책마저 잊어먹지 않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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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서울에다가 휴대폰을 놓고 오는 일이 생겼다. 지난 9일(토)의 일이다. 오후에 서울에 가서 한 신앙공동체의 송년 모임에 참석했다. 집에서 휴대폰 배터리를 교환하는 일을 깜빡 잊고 간 탓에 음식점 종업원에게 휴대폰을 맡기고 배터리 충전을 부탁했다.

모임을 끝내고 일어설 때 휴대폰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며 지난해의 일을 떠올렸다. 지난해의 12월 송년 모임은 10일에 있었다. 그때도 나는 휴대폰을 음식점에 맡겼다. 그래놓고는 휴대폰을 까맣게 잊고 음식점을 나갔다. 제수씨가 입원해 있는 인천 인하대병원에 거의 도착했을 때서야 휴대폰 생각을 했다. 지난해의 그 일을 생각하면서 그런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음식점 방에서 나와 신발을 신는 과정에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까맣게 잊었다. 지하철을 탔을 때 휴대폰 생각을 했지만, 태안으로 오는 마지막 버스 시간 때문에 걸음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내 휴대폰은 그로부터 5일이나 지난 엊그제 14일 내게 돌아왔다. 휴대폰이 없는 5일 동안 나는 어지간히 내 건망증을 한탄했다. 언젠가는 휴대폰을 '개 목거리'로 칭하면서 편리 이면의 부자유를 많이 의식하기도 했다.

그런데 휴대폰 부재는 나 한 사람의 불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휴대폰 연결이 되지 않아 우리 집의 일반 전화로 전화를 해온 이들이 세 분이나 되었는데, 그 분들은 모두 우리 집의 전화번호를 몰랐던 분들이었다. 지난 1월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전화번호도 바뀌었는데, 전화국이 바뀐 전화번호를 알려주던 서비스 기간도 지나버려서 그 분들은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기 위해 애를 먹었다고 했다.

지난 14일 대전 출장을 갈 때는 마누라 휴대폰을 가지고 가야 했다. 그런 탓에 이번에는 마누라에게 걸려오는 학부모 전화들을 처리하느라 수고를 해야 했다.

휴대폰이 없는 5일 동안 내 건망증과 휴대폰이 없던 멀지 않은 시절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했다. 옛날 마누라의 건망증 덕에 콩트를 두 개나 써서 어렵던 시절에 몇 십 만원을 벌었던 추억도 떠올렸다.

옛날 마누라의 건망증 발휘는 내게 콩트 거리들을 안겨 주었지만, 서울에다 휴대폰을 놓고 온 내 건망증은 콩트 거리도 되지 않고, 아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에게 수고만 끼치고 비용만 들이게 한 일이었다.

그런데 휴대폰이 며칠 동안 내 손에 있지 않고 남의 손에 있었다는 그 사실이 한 순간 내게 재미있는 '착상' 하나를 안겨주었다. 확실한 소설 소재를 하나 얻은 셈이다. 내 결코 소재가 달려서 소설 창작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로서 새로 소재를 얻는 것은 기쁜 일이다.

내 건망증 노출로 말미암아 남에게 수고를 끼치고 며칠 동안 불편을 감수하기는 했지만, 그 일이 내게 소설 거리를 하나 안겨 주었으니, 그 '사건'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비록 내 건망증이 점점 심해지기는 하지만, 나는 결코 '중심'까지 잃지는 않는다. 나이를 의식하면서 더욱 분별력을 지니고자 한다. 뭔가를 잃고 노망(老妄)과 노추(老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에서, 내 건망증이 저 망각증세와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늘 명확하게 인식하며 살고자 한다.  


  2006-12-16 14:45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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