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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덕장(德將) 스키피오 장군
작성자배봉균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20 조회수856 추천수4 반대(0) 신고

 

 

 

 지(智)와 용(勇)을 겸비한 덕장(德將) 스키피오(Scipio) 1, 2, 3 합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大王(Alexndros the Great, BC 356-323)은 페르시아와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를 정복(征服)한 다음 이란 고원을 거쳐 그 당시(當時)만

 

해도 다른 세상(世上)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印度)의 인더스 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군사(軍士) 중에 열병(熱病)이 퍼지고 장마가 계속(繼續)되었으므로 BC 324

 

년에 군대(軍隊)를 돌려 페르세폴리스를 거쳐 바빌론에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遠征)

 

을 준비(準備)하던 중 이듬 해(BC 323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알렉산더 大王은 학문(學文)에도 관심(觀心)이 많아서 당시의 대학자(大學者)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마케도니아의 수도(首都)인 펠라의 궁정(宮庭)에 초빙(招聘)하여

 

3년 동안 그에게서 윤리학(倫理學), 철학(哲學), 문학(文學), 정치학(政治學), 자연과

 

학(自然科學), 의학(醫學) 등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 메네쿰스라는 사람을 스승

 

으로 모시고 기하학(幾何學)을 배우기도 하였는데, 정치(政治)에 온 힘을 기울이면

 

서 잠시 짬을 내어 기하학(幾何學)을 배우는지라 공부하기도 힘들고 이해(理解)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大王은  "내가 이래뵈도 大王인데 이 권위(權威)로

 

좀 더 쉽게 그리고 빨리 배우는 방법(方法)은 없을까?"라고 스승인 메네쿰스에게

 

물었습니다. 메네쿰스는 지체(遲滯)없이 이렇게 대답(對答)했습니다. "대왕님 ! 대왕

 

님의 나라에는 대왕님의 전용도로(專用道路)나 사유도로(私有道路)가 있어 누구보

 

다도 빨리 목적지(目的地)에 도착(到着)할 수 있으나 기하학(幾何學)을 배우는 길은

 

모든 사람에게 오직 하나 뿐입니다." 이 일화(逸話)에서 "학문(學文)에는 왕도(王道,

 

지름 길)가 없다."라는 격언(格言)이 생겼다 합니다. 학문을 사랑한 알렉산더 大王은

 

평소(平素)에 호메로스의 시(詩)를 애독(愛讀)하며 원정 때도 많은 책을지니고 다녔

 

으며, 학자(學者)와 기술자(技術者)들을 대동(帶同)하여 각지의 탐험(探險)과 측량

 

(測量) 등을 시켰습니다. 그는 자기가 정복(征服)한 땅에는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

 

지은 도시(都市)를 70여개나 건설(建設)하여 이 도시들이 헬레니즘 문화(文化)의

 

거점(據點)이 되는 동시(同時)에 동서문화(東西文化)의 교류(交流)와 융합(融合)에

 

지대(至大)한 공헌(貢獻)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위대(偉大)한 정복자(征服者)로 세계

 

사(世界史)에서 영웅(英雄)의 한 사람으로 불리워지는 알렉산더 大王은 백성(百姓)

 

들에게 경애(敬愛)와 신망(信望)의 대상(對象)이자 용(勇)을 겸비한

 

지장(智將)이었습니다.


 

      *                              *                                 *                                *


 

카르타고의 명장(名將) 한니발(Hannibal, BC 247-183)은 BC22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에스파냐(오늘날의 스페인) 주둔군(駐屯軍)의 총지휘관(總指揮官)이 되었습

 

니다. 알렉산더 大王의 사후(死後) 헬레니즘 세계(世界)가 분열(分裂)되어 있던

 

그 시기(時期), 카르타고와 로마는 지중해(地中海)의 패권(覇權)을 놓고 치열(熾烈)

 

하게 싸웠습니다. 카르타고는 BC 8세기 페니키아 人이 北 아프리카 튀니스 만(灣)에

 

건설(建設)한 도시국가(都市國家)인데, 로마 人들은 카르타고를 ''페니키아''라는

 

의미의 라틴語로 ''포에니''라고 불렀습니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마침내 시칠리아 섬에서 격돌(激突)했습니다. 제 1차 포에니 전쟁( BC 264-

 

241)이 일어난 것입니다. 카르타고에 비해 해군력(海軍力)이 약했으나 로마는 함대

 

(艦隊)에 신형장비(新型裝備)를 장착(裝着)하여 새로운 전술(戰術)을 선보임으로써

 

카르타고를 제압(制壓)하고 승리(勝利)를 거듭했습니다. 이 전쟁(戰爭)은 시칠리아

 

인근(隣近) 바다에서 23년간 계속(繼續)되었지만 결국(結局) 카르타고는 로마에 패

 

(敗)해 거액(巨額)의 배상금(賠償金)을 지불(支拂)하고 시칠리아에서 완전(完全)히

 

떠나는 조건(條件)으로 강화(講和)를 맺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6살의 어린아이

 

였던 한니발은 9살 되던 해에 아버지 하밀카르 장군(將軍)을 따라 에스파냐로

 

들어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로마에 대한 적개심(敵愾心)을 불태웠습니

 

다. 아버지가 죽고 에스파냐의 총사령관(總司令官)이 되자 20대의 젊은이였지만

 

한니발에게는 로마를 멸망(滅亡)시키겠다는 크나큰 야망(野望)이 있었습니다.

 

그는 에스파냐의 지배(支配)를 우선(優先) 공고(鞏固)히 해 놓고 여러 부족(部族)을

 

평정(平靜)한 뒤, BC 219년 드디어 로마를 향해 출병(出兵)합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의 시작(始作)이었습니다. 한니발은 해로(海路)를 택하지 않고

 

육로(陸路)를 택했습니다. 그는 피레네 산맥(山脈)을 넘어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한니발 군대(軍隊)의 병력(兵力)은 보병(步兵)5만 명, 기병

 

(騎兵) 9천 명에 코끼리 37마리 였다고 전해집니다. 이 중 기병(騎兵) 9천 명은 세계

 

전사상(世界戰史上) 몽골 족(族)과 더불어 기마술(騎馬術)이 능(能)하고 가장 용맹

 

무쌍(勇猛無雙)하다는 아프리카 북부(北部) 누미디아의 잘 훈련(訓練)된 기병(騎兵)

 

이었습니다. 그들과 갈리아 지방(地方)의 겔트 족(族)들은 한니발의 용맹성(勇猛性)

 

과 카리스마에 압도(壓倒)되어 기꺼이 용병(傭兵)이 되고 귀중(貴重)한 정보(情報)

 

를 제공(提供)했습니다. 로마가 한니발의 진의(眞意)를 파악(把握)하지 못하고

 

시칠리아, 아프리카, 에스파냐로 군대(軍隊)를 보내 우왕좌왕(右往左往)하는 사이

 

한니발의 군대는 론 江을 건너 알프스로 향했니다. 코끼리 부대를 포함(包含)한

 

대군(大軍)을 이끌고 눈 덮인 알프스 산맥(山脈)을 넘기로 작정(作定)한 것입니다.

 

추위와 눈사태와 싸우고, 곳곳의 고지(高地)에서 돌을 굴리며 공격(攻擊)하는

 

소규모(小規模) 갈리아 부족(部族)들과 싸우며 한니발은 보름만에 알프스를 넘었습

 

니다. 일찍이 어느 장군(將軍)도 생각지 못하고, 해내지 못한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

 

일을 해낸 한니발은 어느 누구보다도 용맹(勇猛)스러운 용장(勇將)이었습니다.


         

      *                                *                                *                                *


 

로마의 장군(將軍) 스키피오(Scipio, BC 235-183)는 카르타고의 명장(名將) 한니발

 

보다 12살 연하(年下)로 한니발이 BC 219년에 로마를 향해 출병(出兵, 제 2차 포에

 

니 전쟁)하여 알프스를 넘어와 BC 217년 트라시메누스 호반(湖畔)의 전투를 비롯하

 

여 각지(各地)에서 로마軍을 격파(擊破)하고, 특히 BC 216년에 칸나에 전투(戰鬪)

 

에서 기병(騎兵)을 이용(利用)한 용병술(用兵術)을 발휘(發揮)하여 로마 軍에 대승

 

(大勝)을 거두었을 때, 19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출전(出戰)했던 스키피오 자신

 

(自信)도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逃亡)을 하였습니다. 이렇듯 소년시절(少年時節)

 

부터 한니발과의 전투경험(戰鬪經驗)을 통하여 스키피오는 전투(戰鬪)에서 기병

 

(騎兵)의 중요성(重要性)을 깨닫고 앞으로의 수 많은 실전(實戰)에서 응용(應用)

 

하게 됩니다. BC 211년 24세의 스키피오는 자격요건(資格要件)이 16세나 모자랐지

 

만 착한 천성(天性)과 냉철(冷徹)한 지혜(智慧), 전투(戰鬪)에서의 용맹성(勇猛性)을

 

사람들로부터 인정(認定) 받아 공화정(共和政)의 집정관(執政官)에 선출(選出)되었

 

고, 그 이듬해 아버지가 전사(戰死)한 에스파냐 전선(戰線)에 파견(派遣)되어 이 때

 

부터 그의 빛나는 전력(戰歷)이 시작(始作)되었습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이름

 

높은 네 명의 장수(將帥) 하스드루발, 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 한노를 연달아 격파

 

(擊破)하여 에스파냐에서 카르타고 세력(勢力)을 축출(逐出)하고 로마 세력권에

 

편입(編入) 시켰습니다. 스키피오는 4년만에 에스파냐를 평정(平靜)하고 한니발이

 

이태리 반도(半島)에서 결정적(決定的)인 승리(勝利)를 거두지 못하고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 로마 원로원(元老院)의 승인(承認)을 얻어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

 

의 뒷통수를 쳤듯이 카르타고 본국(本國)에 침입(侵入)합니다. 다급해진 카르타

 

본국의 요청(要請)을 받은 한니발은 헤라 신전(神殿)에 자신의 업적(業績)을 새기고

 

피눈물을 흘리며 회군(回軍)합니다. 이렇게 만나게된 두 명장(名將)이 벌인 전투

 

(戰鬪)가 세계전사상(世界前史上) 그 유명(有名)한 "자마 회전(會戰)''입니다.

 

한니발은 16년 로마 원정(遠征)탓으로 기병(騎兵)이 많이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반면(反面)에 스키피오는 좋은 인간성(人間性) 때문에 누미디아의 왕자인 마니시사

 

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에스파냐에서 포로(捕虜)로 잡았던 마니시사를 살려서 풀어

 

준 적이 있기 때문에 마니시사가 누미디아 기병(騎兵)을 보내 준 것입니다.

 

한니발도 물론 누미디아의 또 다른 왕자 사팍스에게 기병(騎兵) 2천 騎를 요청하고

 

약속(約束)을 받았지만 끝내 사팍스의 기병은 오지 않았습니다. 스키피오의 인간미

 

(人間美)와 덕(德)에 매료(魅了)된 누미디아 기병(騎兵)과 로마 시민군(市民軍)의

 

감투(敢鬪)에 한니발이 카리스마로 이끄는 용병(傭兵)들은 점차(漸次) 밀리기 시작

 

했습니다. 희대(稀代)의 명장(名將) 한니발은 결국(結局), 패(敗)하여 도망(逃亡)

 

치고 말았습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이 끝난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스키피오에게 ''아프리카를 제압한 자''라는 뜻의 아프리카누스(Africanus)라는

 

영예(榮譽)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한니발이 용(勇)을 겸비(兼備)한 지장

 

(智將) 알렉산더에게 용맹성(勇猛性)을 배우고 물려받은 용장(勇將)이라면,

 

스키피오는 알렉산더의 지혜(智慧)와 용맹성(勇猛性)에 덕(德)을 보탠,

 

지(智)와 용(勇)을 겸비한 덕장(德將)이었습니다.             

 

 

( 다큐멘타리 필름과 네이버 백과사전, 오픈사전을 참조, 발췌하여 작성했습니다.)

 

                              

                                       

 

 

 

                                                       - 끝 -

 

 

 

이강길
 

 
 
 
 
 

Orange Blossom Special - Billy Vaughn
 

 
 
 
 
신희상( (2005/10/27) : shinada)
 
 
 
 
 
 
 
신희상( (2005/10/27) : shinada)
 
 
 
 
 
 
 
 
 
 
 
 
 
이옥임( (2005/10/27) :

Hannibal

 

 
okim1066)
 
이옥임( (2005/10/27) :

Scipio

okim1066)
 
이옥임( (2005/10/27) :

Alexander

okim1066)

 
 
Re : 스키피오 편 - 보충자료(펌)
 
배봉균
 
아프리카누스 戰史錄 #2 자마 전투 | 戰史 / 전술전략론 2005/03/06 09:36
 
http://blog.naver.com/solskja/80010792699
 
자마 전투사 개략  ‘오, 자마 !’

 

 

아프리카 전황 (B.C. 204~202)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는 릴리바이움에서 추정 병력 보병 1만 6천 명, 기병 1천 6백 기의 원정군을 이끌고 출항했다. 메리쿠리우스 곶 남쪽 부근에 상륙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와 마세실리아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하여 카르타고를 압박했다.

 

 

포에니 전쟁 중의 북아프리카

■ 카르타고 동맹   ○ 제 3지대   X 로마가 승리한 전투   + 로마가 패배한 전투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인 누미디아까지 들어가 마세실리아의 왕 시팍스를 포로로 잡아들였고 마실리아의 왕 마시니사는 자신의 왕국을 되찾게 되었다.

 

  놀란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에게 평화협정을 요청했다. 평화와 전쟁억제를 바랐던 스키피오는 비교적 온건한 강화조건을 내세우며 카르타고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와 로마로 사절단을 파견함과 동시에 한니발과 마고에게도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한니발은 이미 이탈리아 반도를 떠날 준비를 마쳤고 마고는 귀국 도중 병사했다. 조국을 떠나는 그 어떠한 망명객도 적지를 포기하는 한니발보다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니발이 떠나자 로마인들은 환호함과 동시에 또 다른 걱정에 휩싸였다. 적지에서 외롭게 싸우던 한니발은 이제 고향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싸울 수도 있게 된 것이다. 한니발의 합류에 고무된 카르타고는 로마인들의 우려대로 조약을 파기하고 표류한 로마 수송선단을 나포했으며 로마 함선을 공격하기도 했다.

 

유인 및 회담

 

  조약이 파기된 줄 모르고 있던 카르타고의 사절단은 스키피오에게 억류되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비열한 행동에 대하여 로마의 관대함과 도량을 보여줌과 동시에 적에게 모멸감을 주기 위하여 공포에 떨고 있던 카르타고 사절들을 풀어주기로 했다.

 

  한편, 한니발은 하드루메툼에서 누미디아 족장 티케우스의 기병 2천을 받아들였고, 마고의 병력이었던 1만 2천 명의 리구리아군을 접수했다. 혹자는 필리포스 4세가 보낸 4천 명의 마케도니아군도 있었다고 한다. 스키피오는 적지에 고립된 꼴이 되었고, 한니발은 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승리의 여신은 한니발 쪽에 있었다고 리들 하트는 말했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에게 가능한 빨리 합류하라는 급전을 띄움과 동시에 바그라다스 강을 따라 진군하며 만나는 모든 마을을 파괴했다. 이는 마시니사의 진군로를 줄여줌과 동시에 카르타고의 세력권을 유린함으로써 한니발이 카르타고로 가지 못하고 자신을 따라오도록 하게끔 하기 위함이었다. 또 스키피오가 염두에 둔 전장은 기병력이 상대적으로 우세한 로마 군이 싸우기에 유리한 지형이기도 했다.

 

  한니발도 스키피오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하여 자마에 도착했다. 이때, 로마 군을 염탐하도록 보낸 카르타고 척후병 세 명이 로마군에게 잡혔다. 스키피오는 이들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진지를 관찰할 수 있도록 해준 다음 다시 한니발에게 보내 주었다.

 

  이 대담한 젊은 적장에 대한 호기심에 사로잡힌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회담을 제의했다. 스키피오는 그 제의를 수락하며 자신이 회담 장소와 날짜를 통보하겠노라고 답했다. 그와 동시에 스키피오는 자신의 진지를 허물고 물이 가까운, 보다 유리한 장소로 진지를 옮겼다. 진지를 옮긴 그는 그제서야 회담 장소와 시일을 통보했다. 뒤늦게 진지를 옮긴 카르타고군은 물이 멀리 떨어져 있어 고생을 했다고 한다.

 

  두 명의 영웅은 진지에서 가까운 언덕에서 만났다. 먼저 한니발이 인간의 운명의 불확실성을 거론하며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전쟁을 일으킨 것도, 평화 조약을 파기한 것도 카르타고 측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평화 협상을 거절했다.

 

포진

 

 

  다음날 아침, 양군은 나라가라 평원에 포진했다. 스키피오는 중앙에 2개 군단 규모의 중무장 보병대를, 좌익에 라일리우스가 이끄는 이탈리아 출신의 기병대를, 우익에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을 배치했고, 누미디아 보병 6천 명은 군단의 오른쪽에 배치했다. 군단병은 통상적인 세 개의 전열을 형성했는데, 보통 지그재그로 배치되는 마니풀루스들을 1열로 배치해 대형의 중간 중간에 큰 통로를 만들어 두었다. 스키피오는 전열의 맨앞에 있는 경무장 보병들에게 개전의 임무를 맡기고 적의 전투 코끼리隊에 전세가 밀리면 그대로 통로로 대피하거나 첫 마니풀루스의 뒤로 대피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한니발은 80마리의 전투 코끼리들을 맨앞에 배치했고, 그 뒤로 경무장 보병을 포함한 발레아레스, 리구리아, 갈리아 출신의 병사들로 1전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2전대로 카르타고와 아프리카 본토에서 징집한 병사들을 배치했다. 이 1전대와 2전대는 로마 군의 힘을 소모시키기 위한 병력이었다. 마지막으로 한니발의 최정예 부대는 2전대로부터 약 200미터 후방에 배치되었고, 누미디아 기병대는 좌익을, 카르타고 기병대는 우익을 맡았다. 양군의 총병력은 로마 측이 3만 6천 명, 카르타고 측이 5만 5천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기병력은 로마군이 우세했다.

 

결전

 

  전투는 양측 누미디아 기병대의 교전으로 시작되었다. 교전이 일어나자 한니발은 즉시 전투 코끼리의 돌진을 명령했다. 그러자 로마의 경보병들은 코끼리 떼가 다가오길 기다려 나팔을 불었고, 깜짝 놀란 코끼리 떼의 일부는 카르타고군의 좌익으로 달려들었다. 이 와중에 카르타고의 양익은 각기 마시니사와 라일리우스의 공격을 받고 패주했다. 카르타고의 측면은 모두 비게 되었고, 로마의 기병대도 적 기병대를 추격하느라 잠시 전장에서 이탈했다.

 

  로마군에게 돌진하던 전투 코끼리들은 창세례를 받기보다는 로마군이 미리 만들어 놓은 통로로 빠져나가는 길을 택했다. 로마군은 스키피오가 적절한 조치를 해놓은 덕분에 코끼리 떼에 의한 피해는 거의 입지 않았다. 곧이어 양측의 보병대가 중앙에서 맞닥뜨렸다. 갈리아, 리구리아 출신의 1전대는 교전 초의 기세는 사나웠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2전대가 그 전열을 흩뜨리지 않기 위하여 후방으로 밀려오는 패주병의 통과를 허용치 않았기에 패주병들은 2전대를 피해 측후방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기와 전의가 1전대보다 나았다고는 하나 2전대 역시 로마 군이 횡으로 길게 늘어져 세 방면으로 둘러싸 공격하자 곧 무너져 버렸다.

 

 

  드디어, ‘전투력과 경험, 그리고 명성에 있어서 로마군의 진정한 적수’, 로마인들의 피로 얼룩져 온 한니발의 정예 보병대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스키피오는 누구도 생각지 못할 명령을 내렸다. 적의 눈앞에서 병력배치를 새로이 했던 것이다. 스키피오는 프린키페스와 트리알리를 절반으로 나누어 하스타티의 양 옆에 배치시켜, 얇지만 상대적으로 길고 밀집된 대형을 만들었다. 이는 집중된 화력을 보다 넓은 범위에서 가하기 위함이었다.

 

  양군은 그 명성에 걸맞게 한치도 물러섬 없이 호각으로 싸웠다. 오래도록 밀고 당기는 접전이 계속 되었다. 하지만 승부는 마시니사와 라일리우스가 돌아와 카르타고군의 후면을 들이쳤을 때 판가름났다. 카르타고군의 전열은 붕괴되었고, 그때부터는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약간의 기병들과 함께 싸움터에서 빠져나와 하드루메툼으로 도주했다.

  한니발이 패한 것이다.

 

전술전략론

 

  이날 전투로 카르타고군은 2만 명이 전사했고, 또 2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로마군은 2천 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승부가 이날 펼쳐진 양측 전술의 우열을 말해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폴리비오스와 리비우스, 그리고 스키피오 본인도 인정했 듯, 이날 한니발은 최고의 전술을 선보였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스키피오의 손을 들어주었다. 파비우스의 주장에 반대하며 적의 주공을 직접 상대하기 보다 적의 본토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여 적의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철수를 유도하자는 전략을 주장한 이래로 스키피오는 늘 적이 자신의 장단에 놀아나도록 만들었다.

 

  카르타고군 기병력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던 마시니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아군의 기병력을 증강시킴과 동시에 적의 기병력을 줄인 외교적 조치, 지원군의 진군로를 줄여주며 한니발을 내륙으로 끌어들인 전략기동, 적의 첩자를 풀어줌으로써 적에게 가하는 심리적 공격, 적의 회담제의를 이용한 진지이동 등은 그에게 커다란 전략적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한니발은 이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종전

 

  한니발의 제의에 따라 카르타고 평의회는 로마에 강화를 요청했다. 스키피오는 자마 전투 전과 별 다른 차이가 없는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스키피오가 제시한 관대하고 합리적인 조건은 한니발에 의해 실행되었다. 한니발 전쟁은 종식되고 16년 만의 평화가 찾아왔다.

 

  강화가 성립되자 스키피오는 로마로 개선했다. 로마 시민들의 환호는 너무나 열렬해서 그를 종신 딕타토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과 모든 공회당과 유피테르 신전에 그의 조상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 유명한 ‘스키피오의 절제’는 이러한 모든 움직임을 제지케 했다.

 

  33세의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를 제패한 자라는 뜻으로 ‘아프리카누스’라 불리게 된다.

 

 

 
배봉균( (2006/01/27) : 저 위 본문 제목 밑에 있는 인터넷 주소를 클릭하문 배꼽을 볼 수 있습니당...ㅎㅎbaeyoakim)
 
이강길( (2006/01/27) :


배꼽 1번입니다.
u90120)
 
이강길( (2006/01/27) :


배꼽 2번 입니다.
u90120)
 
이강길( (2006/01/27) :


배꼽 3번 입니다.
u90120)
 
이강길( (2006/01/27) : 네이버것은 퍼오면 퍼온 본인의 컴퓨터에는 이미지 파일이나 시청각 파일이 저장되어서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지만 그 페이지를 클릭하는 다른 멀리있는 분들은 배꼽만 보이고 나오지 않습니다. 퍼온 분이 다 잘 보인다고 다른 사람도 보이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교수님 통촉하시옵소서...ㅡ.ㅡu90120)
 
배봉균( (2006/01/27) : 야~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 강 이강길 어리버리 동키호테 파비아노 조교...팍 줄여서 촬리가 한 살 더먹드니 철이 들어두 단단히 들었나부다...어제, 오늘 低山 배봉균 요아킴 교수 맘에 쏙 드는 일만 골라서 하네...ㅇ...기특해라...ㅡ.ㅡbaeyoa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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