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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예수님의 장난감 ㅣ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16 조회수772 추천수6 반대(0) 신고

 2006년 12월 16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오 17,11-12)

 

 Elijah will indeed come and restore all things;
but I tell you that Elijah has already come,
and they did not recognize him

but did to him whatever they pleased.

 



엘리야가 마지막 때에 다시 올 것이라는 믿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깊은 신앙이었으나, 이 마지막 예언자를 이미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운명을 예언하신다


 ☆☆☆


마르틴 부버(1878-1965년)는 현대의 정신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나’와 ‘너’의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곧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이며 만남(대화)을 통하여 자신의 참된 삶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버의 사상은 젊은 교수 시절 한 제자와 이루어지지 않은 안타까운 만남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제자 한 명이 찾아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바쁜 나머지 부탁을 거절하며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그날 밤 자살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은 부버는 커다란 충격과 죄책감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그 뒤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세상에 내려온 엘리야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인격적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관계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상대방의 가치를 발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피상적이지 않은 진정한 인격적 만남을 이룰 수 있을 때에 우리 사이에 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난감


대림시기와 사순시기 때나, 죄 체험에 괴로워할 때나, 그릇되고 중심적인 삶을 돌이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 자주 듣는 노래가 있습니다.

“주여 이 죄인이...” 라는 성가 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


많은 사람 찾아와서 나의 친구가 되어도

병든 몸과 상한 마음 위로 받지 못했다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위로 받기 원합니다.


이 죄인 애통함을 예수께서 들으셨네.

못 잡은 맘 사랑의 손 나를 어루만지셨네.

내 주여 이 죄인이 다시 눈물 흘립니다.

오, 내 주여 나 이제는 아무 걱정 없습니다.


내 모든 죄 무거운 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

내 주여 이 죄인은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모든 영혼까지 주를 위해 바칩니다.’


이 노랫말을 천천히 음미해 보면, 자신의 그릇된 말, 행동, 생각, 곧 삶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순히 반성, 성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자신의 잘못, 허물을 내어 드리며, 용서받고 싶다고...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까지 담고 있습니다.


이 성가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참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습니다.

남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자신의 욕심과 마음대로 살아가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 저자가 자신을 반성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제멋대로 생각하고 자기가 바라고 원하는 방식대로 믿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복음에 율법학자들이 세례자 요한을 자신들 마음대로 다루어 결국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게 하였듯이, 그리고 예수님까지도 자신들의 마음대로 다루어 결국 십자가상에 돌아가게 하였듯이, 이 성가의 저자 역시 많은 잘못들 중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자신의 마음대로 대하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자기 식대로 믿어왔기 때문에 통회의 눈물을...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종 하느님을 내가 바라고 원하는 방식대로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한대로 믿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곧, 이 성가 저자의 잘못이 바로 우리 자신의 잘못을... 모습을 의미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되지 않을 때, ‘하느님 왜 저는 늘 이 모양 이 꼴 입니까?’ ‘왜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라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고,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반듯이 무엇을 드려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청하고 원하며 하느님께 기도하며 매달리는 것과, 하느님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청하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요, 우리가 지녀야할 모습이지만, 하느님을 제멋대로 대하고, 자신의 의지와 뜻에 하느님을 끌어 들이려 하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요, 교만입니다.


이런 모습을 자주 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우리 마음대로 대하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는 분이 계십니다.

작은 길의 영성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려주신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성녀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나는 예수님의 장난감이 되고 싶어요. 아주 귀하고 값비싼 장난감이 아니라, 그저 흔하디흔한 장난감. 예수님께서 가지고 놀다가 그저 아무렇게나 버려두어도 좋을 그런 장난감이 되고 싶어요!’


이 말씀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예수님의 뜻과 의지에 맞추어 살아가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교만하게 성녀처럼 똑같은 삶을.. 같은 생각과 말과 마음으로 살아가겠노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져가는 존재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인 성녀들처럼 살아가지는 못해도, 그분들의 삶을 본받으려는 노력은...그분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성인 성녀가 된 후에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처럼 노력하며 살다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 이찬홍 야고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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