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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삼위의 내주 內住
작성자김명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15 조회수639 추천수4 반대(0) 신고

성삼위는 우리가 생명을 받아 한 영혼으로 이루어질 순간 부터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 살아계십니다.

 

이 곳은 아무도 침입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마귀도 성삼위의 내주 구역에는 침입을 못 합니다.

마귀의 침입 구역은

사람의 감성, 지성, 의지의 외피 구역 까지이지만 성삼위 계시는 그 속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초세기에 영적 거인이시었던 교부 오리게네스가 있었습니다.

이분의 아버지는 오리게네스가 태어나자

 

"나는 이 아이 안에 거주하시는 성삼을 흠숭한다"

 

하며 그 가슴에 키스를 하셨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바로

성삼위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으로 일치, 단순, 평화, 기쁨, 희열, 힘, 영적 지혜....

이러한 것들이 모두 성삼위의 생활모습이며 속성입니다.

 

성삼위를 닮은 인간은 바로 그렇게

'사랑 담는 그릇'으로 빚어졌습니다.

 

사랑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뜻과 예술의 손이 닿는 창조의 태초 분위기를 간직하시며

피조물, 특히 인간이 이그러져 갈 때

그 무한 깊이에서 투과해 보시며 아버지께 탄식하시며 호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모든 회개, 회심, 기도, 희망, 사랑...  은

모두 우리 안에서 하시는 성령의 활동이십니다.

 

아드님 성자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아시고 자원으로 피조의 세상에 들어오십니다.

자유로우신 성삼의 모습인 인간의 모습이

어쩌다 실수로

'자유'가 질식 상태로 희박해졌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회복하여 치유 받는 데에는

하느님 자신이 필요했습니다.

 

'자유'야 말로 인간의 품위와 존엄, 무한가치가 자리잡은 '불가침'의  내부 공간이며

 하느님 모습을 닮은 인간의 모습 중 표정을 지어내는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없이는 인간은 애초의 무한 가치가 유한가치로 폭락하는 쓰레기 품목이 되며,

결국 인간 창조는 아버지의 실패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애초부터

'나' 와 '그 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성삼의 관계 처럼.

 

'나'와 '너' 사이에는

기가 막힌 신비가 들어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누구나 겪는, (부부의) 별의 별 갈등,

선택, 화해, 화합, 응원, 박수......

인간사의 거의 모든 것들이...

아니, 하느님 창조주 자신도

바로 '자유의 영역'에 우리와 함께 들어와 '당신'으로 계신 신비의 영역입니다.

임마뉴엘은 태초로 부터 지어진 하느님의 별명입니다.

(예수의 탄생에 "그 이름을 '임마뉴엘'이라 하리라" 는 전제이지 그렇게 하라는 명령어가 아닙니다.)

 

이번 성탄에

우리에게 회복된 태초의 자유로움 속에

뜻과 정성을 담아

'당신'

'임마누엘'을 맞으시며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삼위의 자유와 사랑,

평화, 기쁨에

감사로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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