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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상품이 되어가는 성탄준비 ㅣ빅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14 조회수616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6년 12월 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오 11,11-15)

“Amen, I say to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been n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요한 세례자는 구약의 예언대로 다시 이 세상에 내려온 엘리야 예언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마지막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천 년간 기다려 온 자신들의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1542-1591년)는 스페인의 신비가로서, 1563년 가르멜회에 입회하여 1567년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르멜 개혁 운동을 이끌며 ‘맨발의 가르멜회’라는 개혁 수도회를 설립하고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영성은 한마디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에 있었습니다. 특히 『어둔 밤』이라는 저서에서는, 하느님께 향해야 하는 인간의 실존 방향을 망각한 채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인간의 비참함을 지적하면서, 인간이 하느님을 올바르게 찾고 사랑하는 길을 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베네딕토 13세 교황은 1726년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고, 베네딕토 14세 교황은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습니다.
이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은 엘리야를 기다렸지만 요한 세례자가 구약의 마지막 엘리야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둠 속에서 하느님께 향하는 길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아직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상품이 되어가는 성탄준비


  오늘 복음은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마태 11,3) 하고 묻게 한 대목과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라는 대답 대신에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4절)고 하셨다.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께서는 구원역사 안에 차지하는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역할에 대하여 증언하신다.(7-19절) 오늘 복음은 그 증언의 핵심부분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모든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9절) 인정하신다. 또한 말라기 예언자가 특정한 때에 올 것으로 예언한 ‘특사’와 ‘엘리야’로 인정하신다.(14절) 말라기 예언자는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 3,1), 그리고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낸다.”(말라 3,23)고 하였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그 길을 닦을 야훼의 특사가 먼저 올 것이며, 세상 종말에 야훼의 심판이 있기 전에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던(2열왕 2,11) 엘리야가 다시 와서 이스라엘의 화해와 재건을 도모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특사(선구자)와 하느님의 세상심판을 준비하는 엘리야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자로 인정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은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을 없었다.”(11절)는 말로 극에 달한다. 이는 실로 놀라운 극찬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보다는 크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극찬이 너무 심했다는 생각에 복음사가가 하향조정을 목적으로 덧붙인 말일 수도 있겠다. 허나 세속의 굴레를 벗고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을 뵈오며 사는 이라면 그가 아무리 작은이라 할지라도 요한보다 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극찬은 세례자 요한의 인품이나 인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구세사적 위치와 역할에 있다. 문제는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과 메시아의 실제적 도래로 시작된 하느님나라가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예언이 요한에게서 끝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예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야훼의 특사요 엘리야인 요한을 잡아다 옥에 가두었고,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늘나라의 열쇠를 쥐고 그 문을 잠가버렸으며, 하느님나라의 상속자인 예수님조차도 세상의 배척과 폭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상도 마찬가지로 하느님나라를 배척하고 폭행하고 있다. 세상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분의 나라도 알 리가 없기 때문에 배척할 리도 폭행할 리도 없다. 그러나 세상은 하느님도 알고 그분의 나라도 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하느님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인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이 아닌가. 그것은 성탄이 세상에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세상은 성탄을 상품으로 생각하고 한 몫 잡을 기회로 삼는다. 아니면 놀 수 있는 휴일로, 선물을 주고받을 계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교회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하지만 상품이 된 성탄 안에 정작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박상대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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