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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독과 찬양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11 조회수627 추천수5 반대(0) 신고

 

<모독과 찬양>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루카 5, 17-26)



  이 대목은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첫 번째로 논쟁을 벌이는 대목입니다. 그들은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관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관념과 해석에만 머물러 새로운 체험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닫혀 버렸습니다. 사실을 사실로 받아드리기에는 그들의 편견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들의 편견에 따르면 이 새로운 광경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이변입니다. 자기들의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건일 뿐입니다.


  이에 반해 군중들 입장에서 보면 말문이 막혀 버리는 장면이 몇 개 있습니다. 지붕을 뜯고 환자를 내려 보내는 사람들, 죄의 용서를 과감하게 말씀하시는 예수, 마비 환자가 즉시 일어나 하느님을 찬양하는 광경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광경을 ‘신기한 일(그리스어,paradoxos,역설)’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세 가지 역설은 자연스럽게 루카복음서의 주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구원을 위한 도움과 협력, 죄의 용서를 선포함, 하느님을 찬양함이 루카복음서 전편을 흐르고 있는 사상입니다.

 

  중풍병자(paralelymenos)는 꼭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뇌 중풍질환 환자가 아니라 ‘해방되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그 병으로 인해 육체적 자유를 잃었습니다. 그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가족들의 보살핌도 무언가 그를 억눌렸던 것에서 해방하는 데는 부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아셨습니다. 그래서 일어나라는 말씀보다 먼저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씀으로 그를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억눌린 점이 있었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큰 잘못을 저질러 용서를 빌고 싶었는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누구를 용서하고 싶었는데 분노가 너무 커 용서하지 못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던 간에 그는 예수님 말씀의 위력으로 자신이 해방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네 집으로 돌아가라’는 두 번째 말씀에 즉각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또 하나 루카저자는 5,26절에 나오는 ‘오늘(그, semeron)’이라는 단어를 독특한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루카복음서에 ‘오늘’이라는 단어가 모두 11회 나옵니다.  안셀름 그린 신부님은 이를 ‘일곱 번의 오늘’로 설명합니다. 그는 루카저자를 전례력의 복음사가라고 부르며,  예수님 당시 일어난 사건을 전례에서 기념하면 그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회적이고 과거의 사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오늘에서도 벌어지는 사건이 되어 구원이 현재화 된다는 설명입니다.

  그 일곱 가지 오늘은 1) 예수의 탄생 2) 세례 3)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최초의 설교 4)중풍병자 치유와 하느님 찬양 5) 자캐오와 식사장면 6) 자캐오가 변화된 뒤 하시는 구원선포 7) 십자가 위에서, 우도에게 구원보증 하실 때 나옵니다.


  안셀름 그린 신부님은 이 일곱 가지 오늘을 7 성사와 연관 지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현존하시는 성사(聖事)를 루카저자는 오늘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눈은 한계가 있어 하느님의 현존을 과거의 회상을 통해서만 직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나 공동체의 체험을 뒤돌아볼 때 그 때 하느님께서 거기에 우리와 함께 계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파스카체험입니다.

  믿음은 그 체험을 현재화 시키는 작업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체험을 현재로 육화시키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7 성사를 통해 항상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루카저자가 5,26절에서 말하는 하느님을 찬양하는(그, doxazo)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도 오늘 우리와 교회 공동체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체험을 찬양하고 고백하여 ‘믿음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찬양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바리사이처럼 눈이 닫혀 있는 자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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