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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 없었던 것으로 하세요 /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10 조회수938 추천수8 반대(0) 신고

                                 

 

 

                   예수님, 없었던 것으로 하세요



   어느 날 낮잠을 자려는데 웬놈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 산통을 깨버렸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수화기를 슬그머니 들었다.

   “강길웅 신부님 좀 바꿔 주세요!”

   십대의 소녀처럼 들리는 앴된 목소리가 날 찾고 있었다.

   “제가 긴데요.”

   그러자 저쪽에서 깔깔깔 웃더니만 자기들은 <생활성서> 애독자 라고 하면서 서너 명의 시끌벅적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 왔다.


   갑자기 당황해진 내가 얼빠진 사람처럼 수화기만 들고 있자니 저쪽에서 또 질문이 쏟아졌다.

   “신부님은 취미가 뭐세요?”

   “빨래!

   나도 모르게 반말을 하면서 생각하지도 않은 대답을 불쑥 터뜨리고 말았다.


   언젠가 웬 아주머니가 비슷한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다.

   “신부님은 무슨 재미로 사세요?”

   “빨래하는 재미!”

   그때도 나는 준비 없던 대답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후딱 해버렸는지 모른다. 어찌보면 난 타고난 농담꾼이요, 순 거짓말쟁이니까.


   사실 나는 매일 빨래를 한다. 빨래라야 겨우 가벼운 내복정도뿐 이지만 그러나 빨래는 분명히 내 일과요, 취미요 그리고 일종의 자존심이 걸린 트레이드 마크다!


   그것은 분명히 중학생 때부터 였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갑자기 “너희들 빨래는  너희들이 하거라” 하시기에 정말 그날부터 내 손으로 내 빨래를 했다. 그때는 식구가 아홉 명이라 우리는 스스로 어머니 손을 덜어드려야 했었다.

  

   선생을 하며 객지생활을 오래할 때도 이불 호청 뜯어서 빨고, 풀해서 밟아 꿰매는 일을 내가 손수했지, 한번도 집에 들고간 적이 없었다. 신학생 때도, 신부가 되고 난 후에도 나는 내복을 어머니께 맡긴 적이 없었다. 아무리 어머니라지만 속옷을 내가 아닌 남에게 준다는 것은 자존심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부가 빨래 얘기하는 것을 우습게 여길지 모르나 그것은 아주 실례되는 말씀이다. 땟물이 흐르는 옷을 빨아서 헹궈 널고 말려서 서랍에 개켜 넣을 때의 그 개운하고 상쾌한 맛은, 빨래를 안 해본 사람은 알 턱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피정이요, 고백성사의 은혜처럼 영적인 내용도 다분히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빨래하기가 싫었다. 아주 싫었다. 감기 때문인지 찬물에 손 대기가 영 싫어서 어제도 못 했으니, 오늘 것까지 하면 이틀 치나 빨랫거리가 밀려 있는데 이것을 또 아줌마 몰래 어디 감춰놓고 외출하려니까 영 뒤가 개운치 못해서 하루 종일 껄적지근했다. 빨래가 무슨 웬수 같았으며 팔자 사나운 생각도 들었다.


   “예수님, ‘빨래 좋다’는 얘기는 취소하겠습니다. 없었던 것으로 해주세요.”

 

                                          



          -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 중에서 / 강길웅 요한 신부(소록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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