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눈 물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30 조회수744 추천수11 반대(0) 신고

                         

 

 

                             눈 물


   천국에는 눈물을 많이 흘린 자의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그 중에도 회심의 눈물을 많이 흘린 자에게 그럴 법한 이야기다. 회심의 주인공이라면 단연코 으뜸 사도 베드로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그 배반죄로 인하여 두 볼에 홈이 패이도록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도 있다.


    30년 간 아들 아오스딩의 회심 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 성녀 모니카와 회두한 후에 돌아가신 그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들이 흘린 회환의 눈물 또한 유명하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고 흘린 눈물이 드럼통으로 몇 통이나 될 거라는 어느 할머니의 푸념이 생각난다. 그런데 문제는, 어쩐지 이 눈물샘이 점점 말라 간다는 느낌이다.


   신앙생활은 깊은 반성과 굳은 결심이라 는 두 기둥 위에 영위되는데 이렇듯 메마른 감성과 무디어 가는 마음은 곧 회심의 어려움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던 광야의 소리는 이미 소음 속에 빛 바랜 사진이 되어 버린지 오래이고. 애타게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도 귓전을 스치는 메아리일 뿐 회칠한 무덤처럼 삭막하고 냉동된 마음이, 나부터도 언제 녹아들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나도 모르게 ‘회심 자폐증’이라는 만성 장애인이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하느님이 천사를 시켜 지상에 내려가 가장 보배로운 물건 하나를 가져오도록 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회개하는 이의 눈물 방울이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평화 방송을 통해 들은 추기경님의 회고록 한 토막. 서품을 앞두고 서품 기념 상본에 넣을 성서 구절을 선택하느라 고심하던 중 ‘하느님의 유산’이라는 글 대신에 시편 50편의 한 구절을 써넣기로 했다고. 이유인즉, 당신이 항상 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였다는 대목에서 가슴 찡한 감동을 받았다.


   마더 데레사는 생전에 인터뷰하는 외국 기자가 “당신은 성녀요” 라는 말을 할 때마다 “아니요. 나는 죄인이요”하고 부인하면서 세 번째는 화까지 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모두가 성녀로 추앙하는 바람에 약간의 교만심을 품게 되었을까? 아님, 세상을 두루 다니다 보니 구제해 줄 사람이 너무 많은데 실제로 다 이루지 못하므로 죄책감이 든 것일까? 왜냐하면 “사람이 선한 일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죄다”(야고 4,17)라는 성서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회개란 세례자 요한이 말했듯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안된다. 세례받기 위해 요르단강에 모인 군중들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속옷 두벌 가진 자는 없는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것이 있는 자 도 그렇게 하고, 세리들은 할당액보다 더 요구하지 말고, 군인들은 아무도 괴롭히거나 등쳐먹지 말고 봉급으로 만족하시오”(루가 3,10∼14)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우리 시대 사람의 신분에 너무나 적절한 말이다. 특별히 정치인들에게 회개 생활을 촉구하는 말 같다.


   언젠가, 일간지에 실린 감동적인 기사 내용 “시민 덕에 키운 공장, 이젠 시민 품으로”라는 제목이 있었다. 80노인이 300억 원 상당의 부지 4000여 평을 그 도시에 기증한다는데, 그 이유인즉, 40여 년 간 공장 때문에 시민들이 소음과 분진 등으로 많은 피해를 겪었다면서 이제 보상하는 의미에서 공장을 이전하며 그 부지를 시민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란다. 그래서 시에서는 그 부지에 공원을 조성하고 공장 이름을 따서 ‘삼덕공원’으로 명명한다는 아름다운 내용이었다.


   이와 같이 회심의 표시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난장이 자캐오가 한 것처럼…. 먼저 생각이 바뀌면 말이 달라지고 따라서 행동이 바뀌게 된다. 그러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가. 사는 동안 우리는 서로 서로 사랑의 빚을 주고받고 있다. 사람은 저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 서로 서로 용서해 줄 죄가 있고 또 용서받을 죄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에 따른 회심을 늘 거듭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따른 회개와 회심은 아직도 요구되는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삶 뒤로 숨길 수도 위장할 수도 없는 즉 복음적 요구이기 때문이다”(상처 입은 감정의 치유에서).


   어느 피정 신부님의 말처럼, 사람이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데 그것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고 할 수 없는 일이란 남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자신은 변화하지 않고 남만을 변화시키려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데에서 불행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네 탓이요와 내 탓이요의 차이일 뿐이다. 자신이 변하면 행복이 온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알고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곧 회개이다.


   한 부인이 수십 년 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미지근한 생활에 자신도 염증을 느낀 나머지, 하루는 신부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화끈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단다. 신부님 왈 “매일 기도하십니까?” 이것저것 많이도 하고 있다는 말에 “그래요. 그러면 제가 시키는 대로 해 보세요. 오늘부터 기도 제목은 ‘나를 알게 해 주십시오’입니다. 한달 동안 이 기도만 하십시오”라는 것이었다.


   한달 후, 하느님은 과연 그 부인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는데, 만신창이 죄투성이 오물투성이인 자신을 보고 아연실색, 살맛을 잃고 말았다. 큰소리치던 가족들 앞에서도 행여 자기 모습이 보일세라 전전긍긍, 얼굴을 들 수가 없으니….


   할 수 없이 다시 그 부인은 신부님을 찾아가서 도저히 살수가 없다고 했더니, 다시 내려 준 처방은 또 한달 간 계속해서 이번에는 “십자가를 알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였다. 한달 후, 과연 십자가를 보여 주셨는데 피 흘리는 고통의 예수님이 나타나셨고 그 고통이 내 죄 때문임을 알고는 또 다시 실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십자가의 예수님이 입을 열어 하시는 말씀, “000야, 그런 너를 내가 사랑한다. 죽도록 사랑한단다….”

 

                     

                 - 수원 버드내성당에서  이호자·마지아 수녀

 

                   
                                     사랑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