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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29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29 조회수360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9-27<또는 루카 10,38-42>

그때에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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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녀 마르타 기념일입니다. 복음 속에 나오는 마르타는 늘 성실하고 주님께 최선을 다해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인입니다. 하느님 일에 대해서는 '바쁘다', '부지런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마르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르타는 우리에게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부족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정말 주님이 바라시는 것인지, 혹은 우리가 알고 행하는 것이 주님의 뜻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 마르타를 통해 드러나곤 합니다. 


그녀의 진심을 사실이고, 그녀의 열심은 훌륭하지만 그것이 꼭 주님과 맞다고 말할 수 없는 장면들이 우리에겐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 다른 마르타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주님을 집에 모셨을 때, 동생 마리아와 함께 보여준 주님 앞에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주님 발치에 앉아있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좋은 몫이라고 칭찬하신 적이 있습니다. 정작 주님을 모시고 대접하려는 마르타가 부끄럽게 되어 버린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섬기려 애를 쓰고 분주한 마르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을 방문한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고,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이 그분께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좋은 몫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빠를 잃은 두 자매는 또 다시 주님을 맞습니다. 그런데 이 번에도 마르타는 먼저 나서서 주님을 맞아 들입니다. 그 슬픈 경황에도 지극한 공경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이것은 분명 그녀가 예수님을 극진히 존경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정신 없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맞이하였고,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신뢰에 찬 말들로 인사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마르타가 입을 열어 주님께 말씀드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여인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헤깔리게 됩니다. 주님과 주고받는 말을 그냥 모아 놓고 보면 이 이야기보다 더한 신앙고백이나 믿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실제 흐름은 그녀의 이 이야기가 도대체 내용이 무엇인지 헤깔리게 만듭니다. 


그녀와 주님이 주고 받는 이야기는 막힘 없이 흘러갑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충실한 대화입니다. 이 대화대로라면 마르타는 주님을 오빠가 있는 곳으로 모셨어야 하고 주님은 그 곳에서 라자로를 불러 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마르타의 고백이 라자로를 살려낸 가장 절절한 기도로 기억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복음의 현실은 달랐습니다. 

이어지는 복음을 보면 마르타는 마리아를 부르기 위해 갑니다. 그리고 그 마리아는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주님을 만나 언니가 한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주님이 계셨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 아는 기적의 순간, 라자로의 소생이 이어집니다. 주님이 라자로를 묻은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명하시자 그분을 막아선 이가 나타납니다. 


그녀가 마르타였습니다. 


오빠의 무덤에선 이미 냄새까지 난다며 주님의 길을 막아섭니다. 



그녀의 고백은, 그녀의 믿음은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요? 그녀가 배운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훌륭했습니다. 주님께 고백한 내용 또한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 오빠를 살리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고, 그럼에도 다 알고 있노라고 믿고 있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라자로를 살리시려는 주님의 생각을 마르타는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속에서 결국 주님은 라자로를 눈물로 살려내십니다. 그 눈물이 라자로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말입니다.

신앙이라는 모습으로 가장 주님께 다가서있는 것 처럼 보이는 마르타, 그녀는 주님께 대한 섬김에도 신앙에도 충실하고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당신을 보려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몰랐고,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며 함께하시려는 주님의 마음 또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 드리는 나의 정성이나, 주님께 대해 알고 있는 나의 지식이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명 우리는 현실에서 그 몫으로 존중받을 수도 있고, 칭찬받을 수도 있습니다. 성당에 열심히 하고 풍부한 신학적 지식을 갖췄다면 그 자체로도 훌륭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멈춰있다면 우리는 주님과 같은 공간에서 조차 등을 지고 떨어져 있고, 주님의 일하심에도 전혀 함께 하지 못하는, 오히려 주님의 수고라며 주님을 막아서는 모습일 수 있음을 걱정해야 합니다. 마르타의 모습은 겉으로 가장 훌륭한 모습이나 내용이 들어있지 않은 신앙의 표본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늘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음식을 맛있게 드셨고, 그녀에게 죽은 오빠를 살려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렇게 그치지 않아서 그녀의 삶에 참 주님을 따르는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아는 것으로, 우리가 하는 것으로 하느님께 다가서는 생활에서 주님의 마음에 가까이 가고, 주님과 함께 그분의 일을 함께 하는 삶을 채워야 할 때임을 성녀를 통해 알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충실한 마르타, 가장 하느님의 뜻을 잘 아는 마르타,

그녀가 주님께 다가가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또 다른 마르타들에게 기대를 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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