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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묵상] 신비를 보고 듣는 눈과 귀 /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27 조회수733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6년 7월 27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을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마태오 13,15)


Gross is the heart of this people,
they will hardly hear with their ears,
they have closed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and hear with their ears
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s and be converted
and I heal them.

 

 

 

 주님께서는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당신을 보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시며,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해 주십니다. 그러나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경우, 또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의 답답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외국을 여행하거나 이민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들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것입니다. 우리말이라 할지라도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설명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황우석 교수의 사건에서 몇 장의 잘못된 사진으로 그 사기가 들통 났습니다. 생물학의 문외한들은 그 사진이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지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기쁜 소식을 알아듣지 못할 때 우리는 얼마나 불행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귀를 기울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 없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신비를 보고 듣는 눈과 귀

   마태오가 제시하는 예수님의 비유설교 집성문(13장)은 총 7개의 비유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3-9절), ② 가라지의 비유(24-30절), ③ 겨자씨의 비유(31-32절), ④ 누룩의 비유, ⑤ 보물의 비유(44절), ⑥ 진주의 비유(45-46절), ⑦ 그물의 비유(47-50절)이다. 비유말씀의 대상은 보면, 전반부 4개는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을 향한 것이며, 후반부 3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13장(정확히 13,1-53) 전체를 분석하여 보면 비유말씀 사이에 비유에 대한 설명과 주변말씀이 들어있다.

   이 부분은 모두 예수께서 군중이 아닌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으로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10-17절), "씨뿌리는 사람 비유의 설명"(18-23절),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34-35절), "가라지 비유의 설명"(36-43절), 그리고 "비유의 결론"(52-53절)에 관한 내용들이다. 따라서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이 서있는 자세로 배에 앉아 가르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오직 전반부 4개의 비유말씀(파종, 가라지, 겨자씨, 누룩비유)뿐이다.

   왜 4개의 비유말씀 외에 다른 말씀들은 군중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주신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11-13절) 우리는 이 말씀을 마태오복음사가의 편집의도와 함께 이해하여야 한다.

   즉 마태오복음공동체의 상황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오복음공동체는 왜 이스라엘 백성의 절대 다수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였냐는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분명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예수님에 대한 외면은 하느님의 계획과 예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때마다 이사야 예언서(6,9-10)를 인용하곤 하였던 것이다.(마르 4,12; 마태 13,14-15; 요한 12,39-40; 사도 28,26-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만 하늘 나라의 신비를 밝혀주심으로써 제자들은 점점 더 깊이 알아듣게 되고 대다수의 이스라엘은 점점 더 못 알아듣게 됨으로써 가지고 있는 지식까지도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는 소명과 선택의 신비도 포함된다. 소명과 선택은 동시에 인간이 가진 신비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나라는 분명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잘못과 고의로 이 선물을 거부한다면 하느님께로 되돌아 가 버린다.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마태오복음공동체나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비유설교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하느님 존재의 신비)에 관한 마지막 도구(道具, instrument)요, 상징(象徵, symbol)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직접 보는 눈과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는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16절) 우리도 일상(日常) 속에 숨어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고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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