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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복음묵상]단식이란 회개위 표징이며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07 조회수702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6년 7월 7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오 9,17)

 

 People do not put new wine into old wineskins.
Otherwise the skins burst, the wine spills out,
and the skins are ruined.
Rather, they pour new wine into fresh wineskins,
and both are preserved."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시어 음식을 나누십니다

 

☆☆☆

 

 사람들은 화려한 식탁을 선호합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더 선호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당신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신지를 잘 모르는 까닭입니다. 유색 인종을 차별하는 미국 사회의 백인 앞에서 황색 인종이 흑색 인종을 차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단식이란 회개위 표징이며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 †



   지난 복음에서 침상의 중병병자와 세리 마태오와 관련한 주님의 모습에서 보듯이, 질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관계를 깨어버리고 죄인까지도 불러 제자로 삼으시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공동체를 이루신 예수께서는 분명 이 땅위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죄의 용서는 갈라지고 깨어진 관계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공동체에로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땅위에서 예수 외에 어느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철칙을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한낱 하느님을 사칭하고 그분을 모독하는 자로만 인식되겠지만,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오늘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단식에 관한 문제로 시비를 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단식'은 일정 기간 동안 종교적 수행이나 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섭취를 끊는 일입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인데,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는데,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규정을 지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습니다.


(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루가 18,12; 마르 1,6; 마태 11,19)


   따라서 오늘복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단식은 율법이 명하는 공식적인 행사로서가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인 수행으로서의 단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에서의 신랑, 새 천 조각, 그리고 새 부대와 새 포도주에 비유하시는데,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입니다. 이 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입니다.


   단식이란 회개의 표징으로서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이며, 구약성서와 유다교에서 단식은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미 도래하셨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ipso facto) 모순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온통 메시아 도래의 기쁨에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합니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새 옷 - 낡은 옷, 새 포도주 - 묵은 포도주, 새 부대 - 헌 부대"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는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층 더 또렷하게 밝혀줍니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도래는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말하는데, 이제 헌 것은 가고 새 것이 도래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묵시 21,1)이 도래했습니다. 새로이 도래한 하느님나라를 헌 것을 가지고 맞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나라를 향한 준비는 마음의 "어느 한 조각"으론 불가능하기에,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과 태도의 전적인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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