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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난한 자들의 편이란 [사랑의 민중 / 빈자]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07 조회수360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느님의 말씀(성경)에서의 가난이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선다고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선다는 뜻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선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쳐 주셨는지 상기해 보아야 한다. 인간 자신들이 만들어 낸 이념들과 사상, 철학만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설 수 없다. 입으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고 머리로서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진정 가난한 편성경에서의 가난)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간과하고 있는 점들이 있다.
 
세상 사람들의 무수한 이론과 이성들은 진정 가난한 편에서,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배부른 돼지의 근성, 아니면 숨겨진 탐욕을 안아 주는 자신들에게 미소 지으면서 다가오는 "정치적 동물" 자신들과 연대해서 인간과 싸우고자 자기 눈에 사욕을 품는게 가난한 편,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에서 언급하는 ''마음(영혼)이 가난한 사람들'' 하고는 다르다.
 
내가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었기 때문이다는 논리는 '세상의 논리'이다. 복음에서의 '가난'을 없애고 '인간중심'의 유토피아적인 세상을 지상에 세우고자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고, 교회와 신앙을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 '거짓된 가난한 자'들 편에 서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역시 예수님처럼 그런 '가짜들' 편에 서지 않는 것이다.
 
현대 물질만능주의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들은 세상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내어 주는' 부유함을 예수님께서는 일러 주신다. '새로운 민중' (가장 보잘것 없는 이들, 세상에서는 가치가 없다고 단정되어진 이들)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내어 줄 수 있는' 충만함을 일러 주신다. 이는 예수님과 함께 "자기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세상의 논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가지려고 하면 더 가난해 지고 내어 주려고 하면 더 풍요로와 지는 하는님의 논리, 사랑의 논리를 세상 안으로, 민중 안으로 들어가서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실천적 신앙인 것이다.
 
더 가지기만을 바라는 가난한 자들은 마음(영혼)이 가난하지 못하여 불행하다. 내어 줌으로써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더 풍요로와 지는 마음(영혼)의 가난한 사람들이 참으로 가치로운 행복을 가질 수 있다. 이들은 "정치적 동물"들에게 이용 당하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그리스도)에 참으로 참여(일치)한다. 이들을 '사랑의 모상'이다 부르고 싶다. '참된 사랑'(인간주의적 사랑이 아닌, '하느님의 십자가 사랑'을 수신)은 이들로 인해서 세상과 민중은 새롭게 다시 빛나게 될 것이다.
 
 
새로운 민중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단지 욕심이 없는 '정지된 상태'의 가난한 마음이 아니다. 비록 빈곤하지만 '내어 줄 수 있는' 실천적 가난한 마음 (진정 가난한 편이다)을 지닌 새로운 '사랑의 민중'(사랑의 모상)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기 해방'을 '자신을 내어 주는' 적극적인 가난을 통해서 성취하며 그리스도 십자가의 삶과 결합함으로써 '완전한 가난'을 이룬다.=> 이를 [신(새로운) - 민중신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부자들에게만 사랑의 의무가 있지는 않습니다. 빈자들에게도 사랑의 의무가 있습니다. 사랑의 의무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계명'인 것입니다. 빈자들은 오직 사랑만을 먹고 사는게 아니라, 빈자들도 사랑을 나눌 수 있서야 하는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약자이지만 영적으로는 강자에 가깝습니다.
 
빈자들에게 '정의'만 알려 주는게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빈자들에게 '사랑'을 알려 주는게 그리스도의 힘이다고 봅니다. 그동안 어떤 분들(사제단 포함해서 그리스도와 일치되지 않으면 무죄한 아기들을 살해하는 헤롯과 같아진다)은 빈자들에게 '정의'만을 중요한 듯이 그렇게 심어왔다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생명의 씨앗은 '사랑'입니다.
 
빈자들이 자신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아닐 것입니다. 초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약자의 상황 아래에서도 "새로운 기초" , 그리스도의 새로운 토대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그들의 사랑의 실천은 빈곤하게 살았지만 오히려 주위의 각성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빈자들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이며 빈자들은 '정의'로 투쟁해야 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간 세상'을 극복해 가야 하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빈자들을 '정의'의 '수단화'로 변질시켜 왔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빈자들은 다시 사랑으로 탄생하고 사랑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빈자의 삶을 '자기 해방'(타인에 의한 해방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해방)으로 성취해 내어야 합니다. 가난한 약자, 빈자들은 '정의'에 동원되어 가는 도구가 아니라 도리어 '사랑'을 실행해 갈 수 있는 실존적인 '강한 실재자'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2009년 10월 첫 게시글 /  수정,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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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가득찬 불평등에 대한 한층 더 예리해진 의식은 그 자체가 모순과 불균형을 낳고 또 심화시킨다. 인간 자신이 바로 그 원인이고 인간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문헌, 사목헌장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

 
"19세기 이래 교회의 [ 사랑 활동에 대한 반대 움직임 ]이 일어났고, 곧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 사랑의 활동이 아니라 정의 ]라고 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특수한 주장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사랑의 활동은 실제로 부자들이 '정의'를 위하여 일할 의무를 회피하고 양심의 짐을 덜어내기 위한 수단이 되어 그들(부자들)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 베네딕토16세 교황님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회칙 중에서 >
 
'마르크스주의적 인간'이란 사랑의 활동에 대한 반대하는 인간의 유형을 말하고자 합니다. 상기에서와 같이 빈자들,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활동이 아니다는 이념으로 계급적 투쟁에 나섭니다. 오늘에 와서 진보되어 온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하느님을 뺀(제외) '사랑'만을 인간에게 차용합니다. 하느님 없는 ''인간의 사랑'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다르게 변질되어 버립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도 사랑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신앙에서 의미하는 사랑과 다르다는 설명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분별할 필요가 생겼다 할 것입니다. 신앙에서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에서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 인간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인간의 사랑은 겉으로는 사랑이지만 속은 사랑이 아니다 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사랑을 부정할 수 없기에 대중들 앞에서는 '사랑의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사랑의 가면'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랑의 가면' 속에 숨겨진 속내면은 계급적 투쟁혁명으로써 반목과 적개심으로 무장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 마르크스주의적 인간의 속성에 기반을 두고있는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다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다고 주장하지만 적개심과 반목을 깔고있는 '인간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사랑 보다는 정의를 우선시 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에게서 나오는 사람의 냄새는 교묘한 인간 지배의 욕정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입니다. 사랑의 활동을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은 그동안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파괴시켜 왔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금세기에는 다시 '사랑의 부활'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본성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피어날 수 있도록 '사랑의 탄생'이 인간들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바로 인간에게서 보면 인간 안에 넣어질 '사랑의 탄생'이다 할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오신 하느님의 사랑의 탄생이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 파괴되어 온 것이기에 오늘의 사람들에게 다시 하느님의 사랑이 탄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탄생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사랑의 부활'이 시작된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은 성자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다름아닌 '사랑의 탄생'인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랑이 탄생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의 생명이 됩니다. 이와같이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에서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만일 예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서 탄생하고 부활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적인 인간'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과 다른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적인 인간
(새로운 민중)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세상의 악에 대한 참된 승리의 해방이 되고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하느님의 생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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