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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복음묵상]복음의 씨앗과 마음의 밭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26 조회수759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6년 7월 26일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마태오 13,4)

 

 "A sower went out to sow.
And as he sowed, some seed fell on the path,
and birds came and ate it up.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여러 장소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로 알려 주십니다. 길에 떨어진 씨앗,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

 

☆☆☆

 

 하느님의 선택은 신비롭습니다. 어쩌면 계획된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컴퓨터의 프로그램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프로그램에 따라 우리 운명이 정해진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바꾸기도 하십니다. 세상을 멸망시키시려고 노아 시대의 홍수를 일으키신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벌을 주지 않으시겠다고 마음을 고치시어 무지개를 약속의 표로 삼으십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결단에 따라 바뀌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결단을 내리면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길들을 준비해 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잘못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우리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방책을 마련해 주십니다. 우리의 올바른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 복음의 씨앗과 마음의 밭

   만약 우리들 가운데 몇 사람이 약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생애를 놓고 각각 한 권의 책을 집필해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10명이 각각 책을 썼다고 해서 그 10권의 책이 결코 모두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 중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료들을 모아야 한다. 우선 가장 중요한 자료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들이 되겠고, 그 밖에도 사도행전이나 서간들, 필요하다면 구약성서와 위경들을 자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아들인 모든 자료들을 토대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쓴다고 했을 때 저자가 10명이라면 10명이 쓴 10권의 책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저자마다 자료들을 분석, 종합, 해석, 편집하는 방법이 다르고, 사용하는 문체나 문장의 표현과 유형이 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가장 가까운 시기에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과 행적에 대하여 기록한 책을 우리는 복음서라고 한다. 복음서가 4개인 이유는 4명의 저자가 서로 다르게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는 4개의 복음서에 붙여진 각각의 이름들이 그 복음서를 실제로 집필한 저자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복음서들이 적어도 예수님의 직제자인 마태오와 요한, 그리고 직제자의 제자인 마르코와 루가라는 사람의 사도적 권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통상 마르코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된 복음서로서 기원후 50년경에 수집된 예수어록집을 근거로 기원후 70년경에 집필되었고, 그 다음에 예수어록집과 마르코복음을 토대로 빨라도 80년 이후에 마태오복음서와 루가복음서가 기록 되었으며, 90년 이후에서 100년 사이에 비교적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요한복음서가 집필되었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공관복음서라 불리는 마르코, 마태오, 루가복음서는 그 분량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상 비교적 대동소이한 양상을 띠고 있으면서, 전체적 사건 자체와 저자 개인의 특수성과 고유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넷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서는 개인의 특수성과 고유성이 한층 가미되어 돋보이는 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각의 복음서를 대할 때, 이런 관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줄곧 마태오복음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들어왔으며, 연중 제21주간 토요일까지 계속 듣게 될 것이다.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는 루가복음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듣게 될 것이다. 참고로 연중 제1주간부터 제9주간까지는 마르코복음을 듣는다.

   주지하다시피 연중시기는 다른 시기와는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있었던 일상 가르침과 행적을 묵상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활철학과 그 정신을 따라잡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마지막 수난, 죽음, 부활사건을 뺀 나머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대략 대여섯 개의 군락으로 엮었다. 이를 크게는 다섯 개의 설교집성문과 한 개의 기적사화집성문으로 나눌 수 있다.

   마태오는 우선 굵직한 10가지 기적사화를 8-9장에 모아 놓았고, ① 5-7장에는 산상설교를, ② 10장에는 파견설교를, ③ 13장에는 비유설교를, ④ 18장에는 공동체설교를, ⑤ 24-25장에는 종말심판설교를 모아 엮어 놓았다. 오늘 복음은 세 번째 설교집성문인 비유설교에 해당된다. 비유설교에는 전부 7개의 비유와 그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는데, 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② 가라지의 비유, ③ 겨자씨의 비유, ④ 누룩의 비유, ⑤ 보물의 비유, ⑥ 진주의 비유, ⑦ 그물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비유를 통한 가르침의 대상을 본다면 전반부 4개는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을 향한 것이며, 후반부 3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오가 집성한 비유설교의 주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의 모두 하느님나라와 그 신비에 관한 것이다. 비유설교에 등장하는 7가지 비유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느님나라의 어느 한 측면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주면서 하느님나라의 특성과 성격을 상징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알려준다. 비유설교의 부차적인 목적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나라의 지상 선포자(宣布者)요 구현자(具現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느님나라의 신비(神秘)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나라의 신비란 말 그대로 신비(神秘, mysterium)이다. 신비란 인간의 이성적 이론(理論)과 인식(認識)을 초월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영묘한 비밀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우리에게 밝혀주려 하신다. 그러나 신비 자체가 인간의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말도 지식도 하느님나라를 제대로 깨우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자. 물론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한다면 오늘 비유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이는 복음이 선포되는 환경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조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느님나라에 관한 복음의 말씀이 항상 좋은 조건에 뿌려진다는 보장은 없다.

   씨가 뿌려진 장소와 그 결과를 비교한다면 비유자체는 쉽게 이해된다. 즉, ‘길바닥 -> 새의 밥, 돌밭 -> 말라죽음, 가시덤불 -> 숨 막혀 죽음, 좋은 땅 ->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결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렇게 비유란 표현되는 이야기를 통하여 보조관념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면에 나타나지만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원관념은 비유 뒤에 숨겨져 있다. 따라서 원관념을 꿰뚫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비유는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그 지혜는 다른 어떤 지식이나 슬기로움이라기보다는 바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말하는 ‘알아들을 귀’(9절)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귀 기울여 듣고 머리로 깨달아 마음에 심는다면 복음은 필히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 밭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복음선포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늘 사탄의 간악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온갖 환난과 박해, 세상걱정과 재물의 유혹이나 그 밖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기대치의 열매를 가져올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조건, 즉 알아들을 귀가 있는 마음에 뿌려진 씨앗은 그 씨앗이 담고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백 배 이상의 열매를 가져오는 법이다. 하나의 낟알이 뿌려져 100개의 낟알을 열매 맺는다는 것은 분명히 과장된 표현이다. 그만큼 과장되었기에 하나의 복음의 씨앗이 가져오는 효과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 땅위에 하느님나라를 건설할 씨앗이기 때문이며,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돌보아 주고 가꾸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니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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