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입장 차이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06 조회수953 추천수9 반대(0) 신고

 

독서: 아모 7,10-17 복음: 마태 9,1-8 아마츠야는 아모스가 사사건건 거슬렸다. 아마츠야는 자기 임금 예로보암의 입장에 서서 매사를 조언하는 처지였고, 아모스는 예로보암 임금이 하는 모든 일에 비난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마츠야는 아모스를 자신들의 영토 한가운데 들어와 음모를 꾸미고, 백성을 선동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마침내 아마츠야는 아모스를 자기 고향으로 내쫓는다. 아모스는 원래 남 유다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이에 격분하여 입에 담기도 험악한 저주를 쏟아놓고 돌아간다. “네 아내는 이 성읍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지며, 네 땅은 측량줄로 재어 나누어지고, 너 자신은 부정한 땅에서 죽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리라.’” 세월이 흘러, 역사는 아모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돌아가고, 후대의 역사가는 아마츠야를 ‘거짓 예언자’로 판결을 내렸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 누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자신들조차도 서로서로 자신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전하는 것이라고 믿었을지 모른다. 복음은 예수님과 율법학자들의 첨예한 갈등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율법학자들은 아픈 사람의 치유보다는 당신에게서 트집을 잡을 거리를 찾으려고 지켜보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그러나 율법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예수가 사사건건 자신들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쪽이었다. 아무 말 없이 중풍병자나 일으켜주면 좋을 것을 왜 꼭 '죄 사함‘이라는 종교적 문제를 거론하며 치유를 하는가 말이다. 그것은 명백히 자신들의 영역에 대한 도전적 언행이며, 율법을 거스르는 말이 분명한데도 가만히 함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세월이 흘러,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한다. 유대교에서는 그들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우리들은 율법학자들은 모두 예수님에 대한 질투와 시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려고 메시아를 못 박은 한심한 사람들로 인식하고. 유대교에서는 율법의 ‘정통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혼란에서 구하기 위한 ‘사목적 필요에서’, 율법학자들의 결정이 올발랐다고 판단한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율법을 뒤흔드는 예수와 같은 사람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마츠야와 아모스, 율법학자와 예수님. 모두가 충실하게 자신들의 입장에서 할 일을 했다. 모두가 나름대로 하느님의 뜻을 대변했다. 수세기 동안 유대교가 그리스도교에 가한 박해. 그 박해를 능가하는 유대교에게 가한 오랜 서구 그리스도교의 응징. 그것이 진정 하느님이 원하는 뜻이었을까? 모두가 하느님을 사랑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차이가 있다. 모두가 이웃을 사랑해도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다. 그 분별이 언제나 명쾌한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깔끔하게 정의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이의 분쟁과 갈등은 어떠한가? 나의 입장만 정당하고 옳다 할 수 있을까? 상대의 입장은 한마디로 단순하게 비하할 수 있을까?
 
사람은, 그리고 그가 처한 입장 차이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복잡하기만 하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