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잊을 수 없는 고문관 . . . . . . . [정채봉님]
작성자김혜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26 조회수950 추천수12 반대(0) 신고

 

 

서열이는 논산 훈련소에서 함께 훈련을 받을 때 '고문관'으로

통했다. 

 

느릿느릿 팔자 걸음을 걷던 서열이,

조교들한테 눈알이 돈다고 그렇게 혼이 나고서도

씨익 암소처럼 웃던 서열이,

그 서열이 하나로 해서

우리 소대원들이 얼마나 많은 단체 기합을 받았던가.

 

오죽했으면 훈련이 끝날 즈음,

우리 소대원들 간에 제일 듣기 싫어했던 욕은

"서열이 하고 같은 부대에 배치 받을 놈."이었으니까..

 

지금도 전장 부대로 배속받는 분들은 느끼시겠지만

트럭 위에 앉아 가면서 보는 산은 왜 그렇게도 악산(惡山)으로

보이던지..

게다가 그날은 진눈깨비마저 날리고 있었다.

 

트럭의 맨 바깥 쪽에 앉아서 한기와 갈증에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보고 안쪽에 앉아 있던 서열이가 자기와 바꿔 앉자고 했다.

 

오줌이 마렵다고 했는데 자리를 바꿔 앉고도

그는 앞단추를 끄르거나 어쩌거나 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가슴 저 안 쪽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다음날 부터 나와 서열이와의 잠자리는 나란해 졌다,

한 매트리스위에 담요를 같이 펴고, 

아침이면 담요 양쪽 귀를 서로 나눠잡고 개키면서,

사단 보충대에서 연대 대기병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대기병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사역으로 뽑혀 갈까봐 P.X 막사나 군종과 근처를 어슬렁

거렸는데 서열이는 자진해서 취사 사역을 다니곤 했다.

놀면 더 춥고 더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다.

 

서열이가 취사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담요 속에서 몰래

내 손에 건네 주는 게 있었는데 그것은 누릉지였다.

그후, 서열이와 나는 대대와 중대까지도 함께 가는 운좋은 사이가 되었다.

 

땅굴이 맨 먼저 발견되었다는 고랑포,

거기에서 우리의 졸병 생활은 시작되었다.

 

봄에는 산골 안개가 짙고,

여름에는 소나기가 자주 지나가고,

가을이 짧고.. 겨울이 긴...

그 철책가의 어느 날 밤이었다.

 

이쪽 저쪽의 총소리가 콩튀듯 일어나고

조명탄의 불빛이 꽃수처럼 퍼져나갔다.

잠복 나간 우리 수색조와 침투해 들어온 저들 사이의

총격전이었다.

 

중대본부에서 전화통을 붙들고 있던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게 있었다.

잠복 나가 있는 수색조에 서열이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끝나고 철수를 하는 대원들 가운데

서열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인솔한 소대장의 말로는 철수할 때까지도 틀림없이 서열이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서열이는 먼동이 틀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할 것 없이 안절부절하고 있던 차에..

땀에 흙에 흠뻑 젖은  서열이의 얼굴이 철책가에 나타났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중대장이 서열이를 불러서 다그쳤다.

머뭇거리던 그가 차렷 자세로 더듬더듬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철수할 때 얼마 만큼 걸어오다 보니

깜박 잊고 온 기관총의 받침대가 생각나더라는 것이다.

 

그건 논 세 마지기의 값이라고…

평소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주었던 사수의 말이 떠올라서

그냥 올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몰래 남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기관총의 받침대를 찾아가지고 오는 길이라는 서열이.

 

그는 그 다음날 당장 열흘 포상 휴가를 받았다.

넓적한 얼굴에 코가 풀썩 꺼진 서열이는 휴가를 떠나면서까지도

나한테 우둔한(?) 말을 남겼다.

 

"열흘 휴가기간을 너하고 반씩 나누어 간다면 더 조컨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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