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06 조회수1,008 추천수12 반대(0) 신고
2006년 7월 6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Some men brought to him a paralytic, lying on a mat.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the paralytic,

"Take heart, son; your sins are forgiven."

(Mt 9,2)

           

 

 

제1독서 아모스 7,10-17

 

복음 마태오 9,1-8

 

요즘 갑곶성지의 경당 공사가 한창입니다. 그러다보니 미사를 무조건 야외에 있는 갑곶쉼터에서 하고 있습니다. 올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만든 쉼터, 식사도 할 수 있고 각종 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데, 이곳이 이렇게 미사를 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 되네요. 그런데 이곳 쉼터를 만들면서 천장 높이를 너무 낮게 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처럼 키 작은 사람한테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키 크신 분들은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는 경우가 종종 있답니다. 어제도 저희 직원 한명이 미사 준비하다가 천장에 머리가 부딪쳤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키 큰 것이 뭐가 좋을까?’

사실 이 갑곶 쉼터에서는 키가 작을 때 더 유리하거든요. 하긴 이 세상에서 키 크다고 유리한 것이 뭐가 있을까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어때요? 키 큰 것을 얼마나 선호하고 있나요? 키가 작으면 그것이 하나의 핸디캡이 되어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은가요?

왜 사람들은 키 큰 것을 선호하고, 또한 아름답고 멋진 얼굴만을 선호할까요? 키가 크다고, 아름답고 멋진 얼굴이라 할지라도 세상 사는데 특별한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지요.

별 것 아닌 것을 부러워하는 것. 그래서 쓸데없는 욕심으로 힘들어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자랑을 하고, 그럼으로써 또 다른 소외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천년 전, 그 당시 사람들은 죄에 대한 벌은 신체에 일어나는 병고와 일찍 죽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가 받았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요? 아픈 것은 둘째로 쳐도, 사람들로부터 받는 ‘너는 죄인이야’라는 비난을 견디기가 너무나 힘들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오히려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아픔을 주고 있는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빗대어 말씀하시지요.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를 해야 할 몫은 바로 주님의 몫인 것입니다. 즉, 저 사람이 죄인이라고 단죄하고 용서하는 몫은 바로 주님의 몫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몫이 바로 나의 몫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만들고 있나요?

우리들은 모두 주님의 귀한 자녀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안에서 별 것 아닌 것으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차별 없이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하나 되기를 기도하여 봅니다.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차별하지 맙시다.



 

 
희망이 보이면 주변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최고의 선물' 중에서)


 

런던의 한 병원에서는 희귀병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나이와 건강상태 등 모든 것이 비슷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한 명은 의사의 얘기대로 6개월을 살았지만, 다른 한 명은 무려 3년이나 더 살았다. 3년을 더 산 그 남자에겐 쌍둥이를 임신한 아내가 있었다.

.... 희망이 보이는 사람에게 주변은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생기면 문제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환경보다는 간절한 희망이었다. 또, 그 희망을 묵묵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 날 창 밖의 풍경이 바뀌어 있음을 알게 된다.

미래는 지금 어떤 환경에 살고 있느냐보다, 어떤 희망 속에서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남이 부러워할 만한 환경을 갖지 못했다면, 남이 부러워할 만한 희망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Which is easier: to say, '

Your sins are forgiven,' or to say, 'Get up and walk'?

(Mt 9,5)




Illum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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