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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월2일(화) 이집트의 聖女 마리아 님..등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01 조회수361 추천수0 반대(0) 신고



4월2일(화) 음2/22

이집트의 聖女 마리아 님..등


 


마리아(4.2)

성인명

마리아(Mary)
축일 4월 2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이집트(Egypt)
활동연도 +500년경?
같은이름 메리, 미리암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Maria)


 



젊은 테오도시우스의 통치 때 팔레스티나(Palestina)에는

한 곳에서만 43년 동안 살았고,
하느님만 섬기는 성 조시무스(Zosimus, 4월 4일)라는 수도자가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요르단으로 향하였으나,
자신은 자기 수도원과 20일 간의 거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기도시간이 되어 시편을 외우고 있었다.
이때 그는 “조시무스 신부님, 나는 여자입니다.
당신의 겉옷을 던지면 나를 볼 수 있습니다”라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의 주인공이 곧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이다.

그녀는 이집트 여성으로 17년 동안이나 거리의 여성으로 살아 왔는데,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28세 때 그녀는 예루살렘으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러 가는
일단의 무리들과 합류하게 되었는데,
여행을 하는 도중에 자기의 악습을 고치지 못하고
열심한 순례자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당도하여 성당에 들어가려 하니,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듯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서 있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윽고 눈을 들어 마리아상을 바라보니,
그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고 한다.

그때서야 그녀는 밝은 마음으로 성당으로 들어갔고 깊이 통회하니,
“너는 요르단으로 가서 여생을 지내라”고 명하여
이렇게 사막에 산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요르단 사막에서 47년 동안이나
사람 한 사람 구경하지 못하고 살았다.

성 조시무스는 그녀를 위해 성체를 영해 주고,
다음 해에 만나기로 하고 돌아왔다.
다음 해에 그가 다시 만나 성체를 영해 주고
그녀가 약속한 두 번째 지점으로 갔으나 그녀는 이미 운명하고 있었다.
“조시무스 신부님, 가련한 마리아를 장사지내 주십시오.”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 사실을 자기의 모든 형제들에게 이야기 해 주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음란에 찌든 영혼을
요르단 사막에서의 47년 동안의 고행과 은둔으로 되살린 여인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 님이시여

현세에서도 요르단 사막에서의 삶과 같은 수련을 통하여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4.2)

성인명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Francis Coll Guitart)
축일 4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12-1875년
같은이름 귀타르트,방지거,프란체스꼬,프란체스꾸스,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프란치스꼬,프란치스꾸스,프란치스쿠스,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Franciscus Coll Guitart)


 



에스파냐 북동부 피레네 산맥과 면한 카탈루냐(Cataluna)의 곰브레니(Gombreny)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Franciscus Coll Guitart, 프란체스코 콜 기타르트)
비크(Vich)에 있는 교구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30년 헤로나(Gerona)의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835년 교회에 반대하던 정부에 의해 헤로나의 신학원이 폐쇄되고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날부터 성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는 죽는 날까지
수도 공동체의 어떠한 지원도 없이
도미니코 수도회의 성소를 영웅적인 신앙으로 지켜왔다.
결국 그는 1836년 비크의 교구 신학교로 돌아와 사제품을 받고
몇 년 동안 본당사목을 한 후 그의 친구의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클라렛(Antonius Maria Claret, 10월 24일)과 함께
순회설교자로 나섰다.

그는 1856년 그가 설교하는 지역의 가난한 이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 탄생 예고의 도미니코 수녀회(La Annunciata)를 설립하였다.
이 수녀회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여개의 수녀원으로 성장했고
오늘날 유럽과 아메리카에 140개 이상의 수녀원을 두고 있다.
1869년 설교 도중 눈이 멀게 되고 건강도 이전 같지는 않았지만
그는 끝까지 은퇴하지 않았다.
1875년 4월 2일 선종한 그는 자신이 설립한 수녀회의 모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1979년 4월 2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9년 10월 11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소속 신학원이 폐쇄당하여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도
혼자서 헤로나의 도미니코 수도회를 죽는 날까지 지켰고
'예수 탄생 예고의 도미니코 수녀회'를 설립하여 유렵과 아메리카에 전파하신

성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 님이시여
저희도 불굴의 의지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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