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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월1일(토) 聖 유스티노 님..등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31 조회수360 추천수0 반대(0) 신고



6월1일(토) 음 4/23

聖 유스티노 님..등

 


유스티노(6.1)

성인명

유스티노(Justin)
축일 6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교부, 순교자, 호교론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00/110?-165년
같은이름 유스띠노, 유스띠누스, 유스티누스, 저스틴




교부 성 유스티노(Justinus)



 


성 유스티누스(Justinus, 또는 유스티노)는 100-110년 사이에 팔레스티나(Palestina)
사마리아 지방에 세워진 플라비아 네아폴리스(Flavia Neapolis)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성장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꾸준히 탐구하는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그리고 플라톤 철학에 연이어 몰두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에사레아(Caesarea)의 바닷가를 산책하던 중에
한 노인을 만나 인간의 모든 사상, 플라톤 사상에도
한계와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그가 그리스도교에 심취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성 유스티누스가 에페수스(Ephesus)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것은 130년경이다.

그는 이후 구도자로서가 아니라
진리의 설파자, 신앙의 설교가로 길을 바꾸어 한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평신도였으나 스승이며 복음의 사도가 된 것이다.
그는 132-135년 사이에 에페수스에서 유대인 트리폰과 종교에 관한 토론을 가졌으며, 이것을 토대로 155년에 “트리폰과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 the Jew)를 저술하였다.
그는 순회교사로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가르치다가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황제가 있는 로마(Roma)에 도착해서
그곳에 머물며 자기 집에서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schola)를 세웠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항의하는
2편의 “호교론”(Prima Apologia, Secunda Apologia)을 썼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호교론자이며
또 그리스도교에 대한 장문의 글을 남긴 최초의 평신도이다.
그는 크레센스라는 견유학파 사람과 논쟁을 벌이다가
그의 사주로 인하여
로마(Rome)의 집정관인 유니우스 루스티쿠스(Junius Rusticus)에게 고발되어
다른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이방 신전에 희생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수많은 고문을 당한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2세기 호교론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토가 걸친 로마 귀족 모습의 성인
흔히 학자나 복음 저자를 그릴 때
책·두루마리 들고 있는 모습 표현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리스도 신앙도 사실은
2000년에 걸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와 노력에 의해
전해지게 된 것임을 잊게 되는데
성 유스티노는 이런 점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신앙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유스티노(100-165년)는 그리스 사람으로 사마리아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135년 경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다.

당대 지식인들이 그러하듯이 그 역시 수사학, 시,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스토아학파나 피타고라스학파 등 당시의 철학에서 진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유스티노가 에페소의 바닷가를 걷고 있던 중
한 노인을 만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관해 듣게 되었다.
“나의 영혼은 즉시 끓어올랐고,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엄습해왔다.
그리고는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유익하고 확실한 철학임을 깨닫게 되었다.”
노인과의 섬광 같은 만남을 술회한 내용으로 그가 그토록 도달하고자 했던 진리를
마침내 그리스도교에서 찾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150년경에는 로마로 건너가서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을 가르쳤으며,
호교론 학파를 설립하였고, 대표적인 저서들을 저술했다.
성 유스티노의 중요성은 성 클레멘스를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저술을 집필한 반면 그는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방어하는 글들, 이른바 호교론을 썼다는 데에 있다.

유스티노가 살았던 로마 제국은 수천 종류의 신이 존재했던 다신교 국가였으며
당시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는 존중되지도, 인정받지도 못했던
수많은 종교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그리스도교인들은 근친상간을 한다는 둥,

식육을 먹는다는 둥 흉흉한 소문마저 나돌고 있었고,
세례와 성체성사는 이상한 마술로 여겨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스티노는 그리스도 교인들이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한 신의 모습임을 알림으로써
당시 떠돌던 흉흉한 소문들이 근거 없음을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이 나라에 세금을 바치고, 정직하게 상업을 하며,
이웃과 평화를 나누는 사람들임을 알렸다.

유스티노가 살았을 무렵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오늘날의 형태로 완벽하게 완성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기 위해
하느님이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 박힘을 통해 하느님이 죄와 마귀의 힘을 누르고 인간을 구원했음을 알렸다.
또한 부활한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것임을 알렸으며,
타 종교와 구별되는 세례 성사와 성체 성사에 대해서도 자세한 기술을 남겼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교리들이 바로 이런 학자들의 덕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성 유스티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열성적 방어와 반대파의 주장을 누르는
빼어난 논쟁 능력은 많은 적들을 낳게 되었고,
마침내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 시절인 165년6명의 교인들과 함께 참수형을 당했다.
대표적 저서로 ‘호교론’과 ‘트리폰과의 대화’가 전해지고 있다.


 



 


초기 교회의 신학적 밑거름이 되셨던
성 유스티노 님이시여,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 교회의 모습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엔+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6.1)

성인명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Hannibal Mary di Francia)
축일 6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메시나(Messina)
활동연도 1851-1927년
같은이름 프란치아, 한니발




메시나의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Annibale Maria di Francia)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Annibale Maria di Francia)
1851년 7월 5일 이탈리아 시칠리아(Sicilia) 섬의 메시나에서 태어났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마태 9,37-38; 루가 10,2)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젊었을 때부터 그의 영성과 사목의 샘이었다.

1878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부터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안니발레 신부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성심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힘없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이라는 이상을 실현시키며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특히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버려진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서 일할 일꾼들을 교회에 보내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로가테, Rogate)의 확산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안니발레 신부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거룩한 열정의 여자 수도회’와 ‘로가치오니스티 남자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
‘전세계가 성소를 위해서 기도하는 날’(성소주일)을 제정함으로써
그 결실을 맺었다.







복음의 덕을 평생 동안 산 안니발레 신부는
1927년 6월 1일 메시나에서 선종하였다.
1990년 10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안니발레 신부는
‘현대 성소 사목의 선구자’와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2004년 5월 1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성체 안의 현존 하느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는 간절한 기도로

남, 여 수도회를 창설하여 주님께 봉헌한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차 님이시여

모든 수도 성직자들이 주님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도록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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