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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녹차 한 잔 받쳐 들고…/ 전 원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03 조회수756 추천수10 반대(0) 신고

녹차 한 잔 받쳐 들고…


신학교 시절 제가 살던 방에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창문을 두고 살았습니다. 창문너머 바라다 보이는 낙산의 아름다운 숲과 성벽과 하늘은 지금도 제 가슴에 남아있는 풍경화입니다. 온 언덕에 연초록 새싹이 돋아나는 봄 풍경하며, 푸른 여름, 우수수 낙엽이 지는 가을, 첫눈이 내리는 날의 설레임… 나의 창문은 시시로 계절의 윤회(輪廻)를 알리며 추억의 선물을 내 가슴에 채곡채곡 채워주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서 가장 잊지 못할 선물은 밤의 풍경입니다. 신학원에 불이 꺼지고 모두가 잠을 청하는 늦은 밤이면, 저는 늘 녹차 한 잔 받쳐들고 가만히 창가에 서서 밤의 풍경과 마주하곤 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현란한 한낮보다, 모든 것을 깊은 침묵과 어둠으로 삼켜버린 밤의 풍경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보였습니다. 마치 묵직한 담묵색의 동양화처럼 밤의 풍경은 무언(無言)의 이야기를 숱하게 건네 왔습니다. 더욱이 별빛이 유난히 밝은 밤에 풀벌레들의 소리를 듣는 가을이면, 온통 내 영혼까지 투명하게 젖어드는 신비의 세계에 서 있곤 하였습니다. 귀를 아프게 하는 한 낮의 소음들도, 종종걸음 치며 살아가는 바쁜 사람들의 모습도, 모든 것을 먹물로 지워버린 원시 원형의 세계, 그 신비의 세계 앞에서, 가장 정직하고 진실한 나와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낮동안 너스레를 떨던 온통 잘난 모습의 나는 간대 없고 오로지 하루의 죄스러움과 부끄러움만이 남아있는, 존재의 밑바닥에서 가련하게 하느님을 찾아 헤매이는 외로운 한 마리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밤은 천개의 눈을 가졌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참으로 오랜만에 늦은 밤 녹차 한 잔을 받쳐들고, 감옥의 창살처럼 좁은 사제관의 창가에 서서 밤 풍경을 내다 보았습니다. 둔중한 몸체의 명동성당이 앞을 가로막고 서 있고, 그 지붕위로 희미한 별들이 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의 그 아름다운 밤 풍경은 아니더라도, 모든 것이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오로지 홀로 내 존재만을 만날 수 있는 그 자체로, 여전히 밤은 나에게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딱히 누구라고 떠오르지는 않지만, 밤은 기다림의 시간이기도 하고, 스쳐지나가는 보고 싶은 얼굴들, 가슴 아픈 사건과 사연들을 어둠 속에서 재회하는, 왠지 그지없이 죄송스러운 고백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참 많이도 좋은 사람을 만났고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누군가의 기도의 힘으로 내가 나를 지탱하고 있음을,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이 허약한 몸뚱이를 보이지 않는 힘이 하루하루 살게 하고 있음을, 밤의 풍경은 나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제 밤을 더 깊이 사랑하는 연습을 하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침묵이 있어 좋고, 마음의 눈이 열려 진실한 나를 마주하기에 좋은 밤, 그래서 나의 창문을 하느님의 커다란 눈동자라고 부르겠습니다. 오늘 밤도 옅은 녹차 한 잔 받쳐 들고 창가에 서서, 그분 앞에 속속들이 순전한 나를 만나야겠습니다. 그 자리에 여러분도 초대합니다.   전원신부

 

* 이 글은 전 원 신부님께서 명동성당 보좌 신부님으로 계실 때, 주보에 쓰셨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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