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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복음묵상]토마 사도는 ‘미꾸라지’인가?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03 조회수677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6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요한 20,24-29)

 


“Unless I see the mark of the nails in his hands
and put my finger into the nailmarks
and put my hand into his side, I will not believe.”

 

 

 

 토마스 사도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다가 주님을 뵙고서야 비로소 주님의 부활을 인정하며,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보이는 것만, 검증되는 것만 믿으려는 오늘의 우리에게 하느님은 믿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많은 사람이 토마스 사도처럼 그분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본 뒤 믿으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성으로 모두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물질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오직 사랑과 믿음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우정이나 사랑도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 역시 믿음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보물이십니다

 

 

 

                   토마 사도는 ‘미꾸라지’인가?



    한해의 반을 넘긴 7월 3일, 교회는 오늘 토마 사도의 축일을 지낸다. 토마는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보듯이 아라메아어로 ‘쌍둥이’라는 뜻이다.(24절) 물론 공관복음의 12사도 명단에는 그냥 토마라고 되어 있다.(마태 10,3; 마르 3,18; 루가 6,15; 사도 1,13) 토마 사도가 어떤 사람인지는 요한복음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그 곳으로 가자고 했을 때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요한 11,16)라고 할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의문이 생기면 꼬치꼬치 캐묻는 질긴 사람으로 보인다.


세상을 떠나실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사(요한 13-17장)가 있던 자리에서도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반문하여 예수로부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대답을 얻어내기도 했다.(요한 14,5-6) 오늘 복음에서 토마 사도는 ‘불신자(不信者)’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불신자로 존재하지 않았다.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고 확인한 후 무릎을 꿇고 감격하는 심정으로 외쳤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이 우리 모든 신앙인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토마는 나중에 인도를 선교하던 중에 순교하였다고 한다. 인도의 마일라푸르의 “토마 언덕”에는 성인의 석조상을 세운 무덤이 있었다. 1547년 선교사들이 여기에 토마 성당을 세웠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성인의 유해는 현재 터키 우르파 주(州)의 수도인 에데사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에데사의 성인 에프렘(306-373) 부제학자는 찬미가를 지어 토마 사도를 찬미하였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 사도의 생각과 말은 2000년 세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되었다. 토마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기 전에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믿겠다고 생떼를 쓰고 있다. 이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이 가지는 불신(不信)의 한 유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신성, 성서가 보도하는 기적들, 동정녀의 잉태, 죽음후의 영생, 육신의 부활 등등에 대하여 믿음보다는 의심을 가진 신자가 적지 않다는 말이다. 개개의 신자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믿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에 대하여는 말하기를 꺼려하고 심지어는 거절하고 불신한다. 그러나 토마 사도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믿음의 조목(條目)이 문제시된 것이 아니라 믿음 전체가 거꾸로 선 것이다. 즉, 예수 전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예수가 살아 있느냐, 죽고 없느냐?’에 토마 자신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말이다.


  우리 눈에 토마는 우선 제자들 가운데 한 마리의 ‘미꾸라지’로 보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제자단에 미꾸라지는 더 많다. 다른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확인함’없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졌는가?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말씀이다. 예수부활에 관한 신약성서의 증언들은 한결같이 부활에 대한 의심을 믿음의 동기로 제시하고 있다.


  불신과 포기와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은 거의 모든 경우,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만남 없이는 3년 동안이나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들까지도 믿는데 어려움을 가진다. 토마 사도의 생각이 옳았다. 과연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의 부활에 달려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모두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 바울로 사도의 신앙고백이지 않는가?(1고린 15,17)


  오늘 복음이 전해주듯이 부활한 자는 불신자의 의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토마 사도는 ‘자신의 눈으로 예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자기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자기의 손을 예수의 옆구리에 넣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토마는 부활예수를 자신의 손으로 확인하기 전에 ‘만남’ 그 자체로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고백한다. 사실(事實)을 보는 것이 믿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직접 보았지만 모두 그분을 믿지는 않았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마치 수학 공식(公式)이나 과학적 공리(公理)같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확실한 증거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공식이나 공리 따위에는 인간의 자유가 차지할 공간은 없다.


  우리의 믿음은 오히려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유와 신뢰와 희망으로 살았던 신앙의 증인들 위에 서있다. 그 증인들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마태 28,20)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이다. 한때 불신의 ‘미꾸라지’였던 토마나 다른 사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듯이, 우리도 믿음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류를 위해 바쳐진 몸으로 계신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과 성사(聖事)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신다.


-박상대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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