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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부님 우리 삼종기도 바쳐요."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30 조회수828 추천수9 반대(0) 신고

                              

 

 

                   "신부님 우리 삼종기도 바쳐요."


 어느 한센병(나병) 할아버지가 나에게 속삭이듯 건넨 말입니다.


 강남성모병원을 출발해 3시간 정도 가면 천주교구라회 이동진료팀을 반갑게 맞아주는 분들을 만납니다. 정착촌에 사는 한센병 환우들입니다. 이 마을 분들을 찾아가면서 새로운 감회에 젖어 봅니다.     


 28년 전 신학생 시절, 처음 소록도를 방문해 미사를 드리던 중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였습니다. 서로 옆 사람과 손을 잡으라고 하는데, 양 옆을 보니 한센병 환우였습니다. 순간 '나병에 걸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망설여졌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들의 손을  덥석 잡고 함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내 생애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기도였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96년 천주교구라회 회장이 돼 다시 그들을 만나게 됐고, 가끔씩 이동 진료가 있는 날 방문하곤 합니다. 오늘도 진료팀과 한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회관에 모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밝은 얼굴로 우리를 맞아 주셨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먼저 진료하고(약만 처방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온갖 얘기를 다 들어 주십니다), 처방을 내 주면 간호사가 약을 지어줍니다. 굳은살과 상처가 있는 분들은 따뜻한 물이 담긴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고 기다리십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불편한 발과 손에 상처가 생기지 않게 미리 굳은살을 깎아 주거나 조금이라도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도록 맛사지도 해줍니다. 손발에 감각이 없으시기에 화상을 입거나 상처가 잘 생기므로 상처 난 곳을 치료해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진료하고 대화하며 왁자지껄한 가운데 한 할아버지가 옆에 와서 작은 소리로 "신부님, 지금 몇 시예요?"하고 속삭였습니다. 시계를 보니 낮 12시였습니다.


 "지금 12시인데요"라고 대답하자  "우리 삼종기도 바쳐요"하고 속삭였습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마련한 두개 의자에 마주 앉아 조용히 삼종기도를 바쳤습니다. 복잡한 환경 에서도 조용하고 성스러운 기도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입니다.


 사제인 나보다 그 할아버지가 먼저 기도 장소를 만들었기에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손발에 상처가 있고 한센병으로 소외된 이들, 바로 이들 가운데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진하게 느꼈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소외된 가운데서도 하느님이 계시는 것처럼, 우리 삶 가운데서 때때로 고통과 외로움, 소외감을 느낄 때도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처럼 그냥 하느님을 의식하기만 하면 하느님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귀가 잘 들리지 않지만, 밭에서 일할 때나 쉴 때나 손에서 묵주가 떠날 날이 없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은 할아버지에게 성당에 안 나온다고 꾸중을 들어도 아무도 노여워하지 않고 오히려 할아버지 같은 믿음이 생기길 기도한다고 합니다.


 못내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뒤로 하며, 달리는 차창으로 밖을 보니 유난히 맑은 하늘과 자연의 정취가 더욱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 하유설 신부/ 메리놀외방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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