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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월17일 야곱의 우물- 루카 18,1-8 / 렉시어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17 조회수359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1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 8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에게 항구한 믿음을 주시어 언제나 주님께 희망을 두게 하소서.

독서
오늘 복음을 읽기 전에, 성경을 해석하는 데 주의해야 할 원칙 가운데 한 가지를 잠깐 짚고 가야겠습니다. 그것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말하게 하지 마라.’ 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대화를 주고받을 때도 그렇지요. 한 사람이 어떤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말을 하는데,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말 한마디 또는 어떤 표현 한마디에서 꼬투리를 잡고 그 뜻을 곡해한다면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바로 그런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복음을 그대로 읽으면, 하느님을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 으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기분에 따라 기도를 들어주고 싶으면 들어주시고 들어주기 싫으면 귀를 막으시고, 귀찮게 조르면 마지못해 들어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일까요 ? 하느님은 “불의한” (루카 18, 6) 분이실까요 ?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 첫 절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1절) 다른 말로 하면 이 비유의 초점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라 그 재판관에게 지칠 줄 모르고 호소하는 과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는 재판관에게, 자신과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매달립니다. 재판관은 쉽게 과부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지만, 과부는 재판관이 들어줄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재판관이 그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고 또 과부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재판관에게 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절에서 ‘믿음’ 을 말하는 데서도 알아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 청원을 드리며 매달리는 데 바탕이 되는 것도 그런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실 거라는 믿음,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의 일들이 하느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믿음 말입니다.
 
재판관을 “귀찮게” 했던 (5절) 과부의 경우와 같이, 어쩌면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이거나 아니면 하느님께 저항하는 것 같은 탄원 기도가 의미를 가지는 것도, 하느님께서 변화를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다면 부르짖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1절)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언제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아직 낙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이나 욥의 탄원과 같이 하느님을 원망하고 고발하며 자신의 무죄함을 내세워 하느님께 항변하고 때로는 자신이 태어난 날까지 저주하는 기도일지라도, 그런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일이, 그것이 자신이 당하는 불행일 때도 하느님과 무관하지 않다는 확신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저항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은, 마치 세상의 일들이 하느님께 너무 멀리 있는 듯, 하느님께서 너무 높이 계셔서 개입하실 수 없는 듯 (시편 10, 5), 포기하고 하느님께 부르짖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태도가 만연하게 되리라는 염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 지금 우리의 모습,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하느님께 부르짖지 않는 우리의 태도는 바로 믿음을 잃어버린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 재판관에게 줄기차게 매달리는 과부처럼 하느님께 “밤낮으로 부르짖어야” 하는 것은 (7절) 하느님께서 귀가 멀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르짖음이 바로 믿음의 표현이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성찰
변화의 가능성을 믿고 있습니까 ? 그 변화를 위해 하느님께 호소하고 있습니까 ?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실 때까지, 아무런 전망이 보이지 않을 때라도 하느님을 붙잡고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믿음을 청합니다. 야뽁 건널목에서 하느님과 밤새 씨름하며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 (창세 32, 27) 라고 말했던 야곱처럼 말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니 어서 저에게 오소서. 제가 당신께 부르짖을 때 제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저의 기도 당신 면전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손 들어 올리니 저녁 제물로 여겨 주소서. (시편 141, 1 – 2)
안소근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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