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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살던 신학교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28 조회수958 추천수13 반대(0) 신고
                     

                                        - 기숙사 전경-

 

                                        내가 살던 신학교



  입학시험


   신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강당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시험장에서 일을 도와주던 신학생이 나를 보더니 앞을 막으면서 “나가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닥친 일이기에 엉거주춤하고 있었더니 “학부형은 밖에서 기다려 달라”면서 정중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른네 살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머리마저 벗겨지고 얼굴 또한 거무스름했기 때문에 나를 40대 중반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공동침실


   입학하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도대체 누가 밤에 잠꼬대를 하느냐?”면서 자습실이 한 번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누가 했을까?’나도 궁금해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한 학생이 나를 가리키면서 “큰형님이 밤마다 잠꼬대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잠꼬대가 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정작 나자신은 하는지 안 하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밤이면 옆 사람을 가끔 깨우곤 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잠 하나만은 끝내 주겠다는 듯이 잘 자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웬 친구가 “형님, 영자가 누구요?” 하기에 “아니, 영자라니?” 라고 반문했더니, 내가 밤마다 “영자씨!”를 찾는다면서 조심하라는 언질을 주는 것이었다. 갑자기 의기가 소침해진 나는 밤마다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애를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자씨!’ 사건은 그 친구가 꾸며낸 얘기였다.



   교  련


   입학할 당시에 나는 이미 제대한 지가 10년이나 되었지만 계속해서 교련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고 농땡이를 친다든지 열외를 한 일은 없었고, 이것도 신부 되는 한 과정이라 여겨 어떤 훈련이고 기쁘게 받곤 했다.


   특히 사단의 입영훈련 때는 땀 꽤나 흘렸지만 재미도 있었고 또한 교관이나 조교들이 많이 봐주기도 했다. 어떤 교관은 나를 보고 “고맙다”는 이상한 인사까지도 했다.   천만의 말씀을!



   타종당번


   2학년과 3학년, 2년 동안은 학교의 종당번을 했다. 누름장치가 본관 1, 2층 중앙과 침실 앞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기상벨과 수업벨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내가 벨을 누름으로써 알려 주곤 했다. 그때는 그 일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거짓말 보태서 2년 동안에 5초 이상 틀려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하루 열 번식 정확하게 벨을 눌렀는데, 그때는 내 엄지 손가락 하나에 학장 신부님도 왔다갔다 하셨다!



  어떤편지


   그때의 학장 신부님은 자주 편지 검열을 하시곤 했었다. 편지마다 일일이 개봉을 하시기 때문에 여학생이나 아가씨들로부터 편지를 받는 신학생들은 곤욕을 치르기도 했는데 어떤 신학생은 학장 신부님 앞에서 절교의 편지를 쓰기도 했었다.


   어느 점심시간에 나에게도 학장 신부님의 호출이 떨어져 엉금엉금 기어갔더니 웬 여자한테서 온 편지를 나에게 건네 주시는 것 이었다. 겉봉에는 ‘가타리나’라고 씌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를 몰랐다. 학장 신부님은 개봉도 안 하시고 그냥 주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목포의 웬 여학교 선생님이 당신의 자녀 문제로 나에게 무슨 말을 한 내용이었다. 난 또 뭐라고!



   왕개미


   내 별명은 “종지기‘ 외에 ’왕개미‘ 라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개미회장직을 여러 해 하니까 학교의 직원 아가씨들이 지어 준 이름 이었다.


   난 쓰레기 치우는 일을 좋아했다. 회원들이 십여 명 있었는데 하나같이 열심히 성의껏 쓰레기 치우는 일을 잘 해주었다.

   모아진 쓰레기는 쓰레기장에서 분류하여 어지간한 것들은 모두 고물상에 팔아 교도소 수인들이나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쓰곤 했는데, 그땐 수지값이 없어서 일만 죽어라고 했지 인건비(?)도 안 나왔다.



  술


   술 얘기만 하려면 내 얼굴은 늘 뜨거워진다. 2학년까지는 잘 참았는데 물꼬가 한 번 터지자 가끔 주체치를 못해서 정신을 못차릴 때가 있었다.


   4학년 때였던가. 송광사에 학년소풍을 갔다가 오가피주를 사이다 마시듯 했더니 나중에는 어찌 신학교에 돌아 왔는지를 모르겠고, 그 이틑날은 강의마저 다 빠지는 등 처음으로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가.  ‘강길웅이 술을 좋아한다’는 얘기가 돌아서 교수 신부님들이 가끔 나를 불러 술대접을 해주시곤 했는데 신부님들의 사랑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따뜻해지며 고마웠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러나 신학생들은 술을 백 번 조심해야 한다. 신부가 된 후에 많은 문제도 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무섭게 알아야 한다.)



   시험


   무슨 요령이나 방법은 모르면서 공부 하나만은 미련할 정도로 많이 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시험을 잘 치르는 것도 아니고 결과야 늘 뻔한 것인데도 ‘동정점수’가 플러스되어 학점은 늘 B학점 이상이었으나 송구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몇몇 신학생들의 꾀임에 빠져 어떤 신부님을 찾아가서 “이번 시험은 생략합시다” 하고 낯짝 좋게 말씀드렸더니 의외로 “좋다”고 하시면서 내 성적만은 A학점을 주시는 것이었디.


   그 비슷한 일들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떳떳치를 못해서 마음이 괴롭다. 그러나 시험을 안 봤어도 시험공부를 안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때 시험을 본다 해도 난 항상 자신있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 품


   신학교 6년간의 생활은 결코 긴 세월이 아니다. 내 짧은 생애에 이보다 더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은 다시 또 없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부제생활 마지막 시기에는 어떻게 지냈는지를 모른다. 공연히 흥분만 앞서 가지고 정작 필요한 내적인 깊이는 헤아리지 못하고 외적인 준비에만 분주했으니, 성인열품도문 때의 그 엎드린 기도에서도 ‘내가 정말 신부 되는 것인가?’ 하는 의혹과 감격이 엇갈렸으니 마지막까지 분심이 많았던 인생이다.


   신학생의 목표는 신부로서 서품이지만 서품 그 자체. 신부 그 자체로서는 가장 큰 목적이 아니 되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그게 그렇게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옷을 아무렇게나 벗고 나가는 젊은 신부를 보면서 ‘무엇 때문에 너는 서품을 받았더냐? 라는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 보기도 했다.


   좌우간 82년도 1월에 신부로 서품 되었으니 내가 사범학교를 졸업한 지는 만 20년 만의 일이요 나이로는 마흔이었다.



                                  -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 중에서 / 강길웅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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