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잠근 문? ^^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27 조회수762 추천수13 반대(0) 신고

 

 
독서: 2열왕 19,9ㄴ-11.14-21.31-35ㄱ.36
복음: 마태: 7,6.12-14


어렸을 때 읽었던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그 때는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결말에
막연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아름답게 보였는데.

금욕주의적인 시대와 가정적 정서 속에서 자라난
지드의 생애가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알리사와 제로옴의 신비로운 사랑은 그 빛을 잃고
오히려 지드와 마들렌 부부의 반쪽(?) 사랑에
아련한 아픔이 느껴지는 책이다. 

................

인간의 본성을 회피하고 억누르고 산다는 것.
우리 시대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까?

.....................

방학동안 신학생들에게
몇 번 연락할 일이 생겼다.

“아무개 신학생 댁인가요?”
순간, 잠시 침묵이 흐르거나
대뜸, “그런데. 누구시죠?”
(경계심이 파바박! 느껴진다.  ^^)


“저는 같은 반 학생인데요.”
“혹시 이야기 들으셨나 모르겠네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의 신원을(특히 나이 ^^)
소상히 밝혀 가족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그래도 몇 번의 걸름장치(?)를 통과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전화는 삼가지만
학생들이 부탁한 경우나,
그 학생에게 꼭 필요한 긴급한 전언이 있을 경우에만 하는데도
그렇게 취조를(?) 당하는 내 입장에선 여간 억울한 게 아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모르는게 아니고
걱정이 되는 부모님의 입장을 백번 이해하고 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경우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교수신부님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개학이 되어 학생들이 학교로 속속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일반 평신도들만 다니는 신학원에서
어떤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는 다 뒤로 넘어갔다.  ^^
방학 내내 신학생들이 무사(?)하기를 기도하시다가도
“그래, 어차피 본당에 나가면 치마폭에 쌓여 지낼텐데...” *^^*
하는 마음도 드신다고...

큰 일만 아니라면 조금씩 면역이 생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 같았다.

어차피 교회는 여자들이 숫적으로도 더 많고
주된 활동을 거의 여성들이 하지 않는가 말이다. 
면역과 내성을 조금씩은 길러야 사목에 지장없지 않을까? ㅎㅎ

.....................

어떤 교수 신부님이 학생들에게 물으셨다.
“왜 자매들을 조심(?)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나?”
학생들이 대답했다.

“위험하니까...”
“사도직에 방해가 되니까...”
“유혹에 빠지기 쉬우니까...”
“하느님 일보다 인간적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니까...”
.... 등등의 뻔한(^^*) 대답이 나왔다.


교수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한마디로 ”좋으니까..” 였다. (헉!)

.................

그렇다,
맞는 말씀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그것이 '좋으니까...’지남철처럼 끌려가는 것 이다.

말할 수 없이 좋지만, 더 좋은 것을 위해
그것을 포기한 사람들이 사제들이라는 것이다. 

교수 신부님은 매 시간
“사제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누누이 강조하셨다.

인간적 사랑도 가치있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큰 사랑을 위해 희생을 마다않는 사람들이
사제라는 것이다.


그렇다.
옛날 같으면 ‘마귀, 세속, 육체’의 세 가지 피해야 할 것들 안에
여자도(異性도) 끼였을 테지만.
이제는 이성을, 육체를 배척하고 멸시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풍요롭고 신비롭다.
자신을 열고, 비우고, 헌신하게 하는 인간적 사랑은
聖스럽기까지 하다.


(어제는 TV에서 한국 전쟁 때, 자신을 찾아 월남하다 죽어간
첫사랑 여인을 기리며 일흔이 넘도록 독신으로 지내는 할아버지가 나왔다.
이분의 사랑에서는 종교적인 숭고함 마저 느꼈다. )


그렇다면 왜 고집스럽게 독신제를 고수하는가?

.....................


가톨릭 사제들의 독신제에 대해 재고(再考)해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피력하시는 신부님도 계시지만,
그 이유가 현실적 이유라면 어쩐지 그렇다.
(서구사회에서 드러내놓고 문제가 되는 사제들의 성윤리 때문?)
(초기 독신제는 종말 임박설 때문이고, 실제론 수세기 후에 공식 도입되었기 때문?)

그 교수님은 성품에 오르기 전에 선택을 하게 하고
품에 오르고 나면 바꿀 수 없도록 하자는 대안도 제시하셨다.
(동방정교회는 고위 성직자의 경우는 독신 사제에 限한다고 들었다)

..........................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아무튼 지금의 가톨릭 사제들은 사제가 되기 전에,
자유로이 독신제에 동의하고 있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부모나, 형제나, 누가 은근히 강요하고 있다면
그건 큰 문제(죄악?)와 불씨를 잠정적으로 덮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자신을 위해, 자기 가족을 위해서 사는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동의했다면....
끝까지 그 길을 가주길 희망한다.


나는 갈등하는 신학생들을 보면 언제라도 말한다.
우리 결혼한 형제들도 쉬운 길이 아니라고.


한 가정의 가장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 지.
처자식을 위해 어떠한 고생을 하는지.
정결의 서약을 지키기 위해
(배우자를 향한 갈라짐없는 마음이 '정결'이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성직자 못지않게 사투(^^*)하는 형제들도 꽤나 많다는 것을.

그렇다.
우리는 어차피 한 길을 선택할 뿐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 호기심을 갖는 것은,
미련을 갖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기억한다.
정치적, 사회적 현실이 험악했을 때,
딸린 식구들이 없는 가톨릭 사제들이 그 누구보다도 소신을 가지고
자신들의 믿는 바를 목숨을 걸고 외쳤던 것을.
어둠 속에서 소외받는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누구보다도 발벗고 나섰던 사람들이 사제들과 수도자들이었다는 것을.


아마도 우리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 사제상
그들 모두가 되고 싶은 사제상이
바로 그런 모습이기에
그들은 ‘그 좋은 것’을 포기하고
'보다 더 좋은 것‘을 선택한 특별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이루어나가도록
그분들을 지켜주고 돌보아 주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특히 ‘그 좋은’ 자매들에게 있을지 모른다. ^^*


‘좁은 문’이 아니라,
스스로 ‘닫은 문’
그렇게 굳게 '잠근 문'의 빗장을
함부로 열려고
엿보려고 애쓰지는 말아야 한다. *^^*





 

 

 

 

 


Part 2 - Chorus : "Ruht wohl, ihr heiligen Gebeine" (No.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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