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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좋은 나무'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27 조회수653 추천수3 반대(0) 신고

<좋은 나무>(마태 7,15-20)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 나무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이 세상에 좋은 나무가 있고 나쁜 나무가 있는가? 어떤 나무가 좋은 나무이고 어떤 나무가 나쁜 나무일까? 나무 자체는 다 좋은 나무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작품으로서 나무 자체에는 좋고 나쁜 것이 없다.

 

그러면 좋은 나무는 어떤 나무이고 나쁜 나무는 어떤 나무인가? 좋은 나무란 건강한 나무이고 나쁜 나무란 병든 나무이다. 건강한 나무는 수분과 양분을 빨아 들여서 싱싱하게 자라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병든 나무는 수분과 양분을 빨아들이지 못해서 메말라 가고 점점 약해지고 죽어간다. 잎이 시들시들해지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결코 병든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좋은 나무는 한 그루밖에 없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만이 좋은 나무일뿐이다.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되려면 건강한 나무인 즉 수분과 양분이 가득한 나무에 붙어있을 때 가능하다.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이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태워 버린다."(요한 15,5-6)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건강한 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붙어 있어서 나도 건강한(좋은) 나무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나무가 바로 진복팔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이며 그렇게 살아갈 때 진복팔단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좋은 나무이다. 그러나 이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에게 좋은 양분을 제공해주는 예수라는 좋은 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 좋은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나무에게 양분을 제공해주는 예수라는 좋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병든 나쁜 나무가 된다. 왜냐하면 좋은 양분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고 하셨다. 거짓 예언자들이란 누구인가? 거짓 예언자들이란 거짓말을 하는 예언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거짓을 말한다면 예언자라고 말할 수 없다. 마태오 복음에서 거짓 예언자라고 말하는 것은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자기들이 말한대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행동이 그리스도인 답지 않을 때 거짓 예언자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성직자이다, 수도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답게 성직자답게 수도자 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매일 기도를 한다, 봉사를 한다, 사목회장이다, 구역장이다, 단장이다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열매이다. 어떤 열매를 맺느냐가 중요하지 어떤 자리 도는 어떤 직책이나 신분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어떤 신분이든 또는 어떤 자리에 있든 거기에 맞갖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신분은 그럴 듯 한데 거기에 맞갖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조심해야할 거짓 예언자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로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셨듯이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이지 신분이나 생각이 아니다.

 

모 일간지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제목 "어느 쌀집아저씨"

어지간해서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감동적인 미담을 듣기가 어려운 요즈음, 내게는 몇 달을 되새겨도 여전히 처음같은 새로움으로 생각을 거듭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동네의 쌀집아저씨. 그는 지금부터 6년전,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헐벗고 굶주린 무의탁 노인들에게 매일 따뜻한 밥 한끼를 지어 대접하고 있는 젊은 성직자의 삶을 알게 된다. 며칠 후 그는 봉고차에 20킬로그램짜리 쌀 14부대를 싣고 그곳을 찾아간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약속 하나를 남긴다. 앞으로 일주일마다 한번씩, 이렇게 쌀 20킬로그램을 가져오겠노라고.


서울 외곽 동네의 조그마한 쌀가게 주인, 그러나 재산이라곤 전세로 살고 있는 허술한 연립 주택이 전부인 그는 그날부터 조용하게 자신의 약속을 지켜나갔다. 그 사이 여러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으나 그는 늘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 일주일에 한번씩 조용하게 쌀부대 14개를 전달할 수 있는 것, 그것 뿐이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 그 쌀부대 14개를 보게 된 것은 나 역시도 우연이었다. 처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 아름다운 미담이 역사가 어언 6년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큰마음 먹고 행하는 것도 아닌, 꼬박 꼬박 일주일에 한 번씩 6년이었다. 그것도 조직적으로 이웃을 돕는 단체나 여러 사람이 모여 선행을 베푸는 모임에서 쌓인 역사가 아니었다. 너무나 평범해서 오직 쌀집 아저씨라는 호칭으로만 불릴 수 있는 보통의 시민이 홀로 묵묵히 쌓아온 시간의 두께였다.


그리고 또하나, 이 일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하는 부분은 6년을 한결같이 그 사람이 자신의 일에 대해 요구한 익명성이었다. 그는 한사코 자신의 일이 미담이라는 이름으로 노출되는 것을 반대했다. 여러 경로로 확인해보았지만 정말이지 그는 이 쌀부대와 관련해 그 어떤 것도 바라는 바가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매일 밥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일주일에 14부대씩 6년이면 부자라해도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다. 하물며 이제 막 자신의 가게를 일구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평범한 가장인 쌀집 아저씨가 어떻게?

그 돈을 보태면 집도 넓힐 수 있고, 삶의 여러 관계에서 제법 폼을 잡을 수도 있는데, 그 욕망을 다 어떻게 처리하고?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나는 아주 복잡해진다.

이 미담을 처음 들은 후 지금까지 몇 달간 나는 틈만 나면 이 이야기를 해석하고, 추측하며, 나아가서는 길게 사색한다.


이제 지칠 때도 되었건만 웬일인지 나는 이 이야기에서 벗어나고 싶지가 않다. 화가 나거나 쓸쓸할 때는 일부러라도 마음 속으로 이 이야기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또 사색한다.


이제 쌀부대 이야기는 나에게 하나의 미담,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에 관한 하나의 보고서다.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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